10년 뒤 먹고살 길은 ‘금융’이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삼성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실적 부진으로 대규모 경영진단과 구조조정 그리고 이례적인 연중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최근에 벌어진 정전 사태 역시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는 평이다. 이건희 회장이 “10년 후엔 무엇으로 먹고 살지 걱정”이라 공언했을 만큼 그룹의 주력 분야였던 제조업 분야에서 체감 성장 단계로 접어든 징후가 눈에 띌 정도로 뚜렷해진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의 신 성장동력에 대한 논의가 잦아졌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이후 신수종 사업 개발을 독려했지만 자동차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겪은 뒤 삼성그룹의 신수종 사업 개발은 사실상 개점 휴업이었다. 그런 삼성을 구원한 것은 반도체 대박이었다. 이런 반도체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삼성이 금융업 확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삼성에 이어 재계 2위를 달리고 있는 현대차그룹 역시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가 올 2분기에 최근 3년간 분기별 최고 영업이익을 내면서 ‘깜짝 실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해외 부문에서의 매출 확대가 주춤한 반면 내수 판매가 늘어난 덕을 톡톡히 본 까닭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면에서 현대차도 역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자동차 회사가 제조 판매보다 금융업에서 더 큰 실적을 올리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인사들도 많다.
그렇다면 삼성과 현대차는 금융업 확대를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까. 우선 삼성그룹 안팎에 나도는 M&A 관련 소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몇 달 전부터 삼성 주변에선 ‘그룹 내부에 M&A 전담팀이 활동 중’이란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과 더불어 제조업 분야 관련 M&A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삼성은 이미 전자 쪽에서 사업 구조조정을 통한 체질강화에 나섰다.
문제는 삼성의 마르지 않는 화수분 역할을 해 온 금융분야의 강화. 사실 삼성은 보험과 증권 등을 통해 국내 금융가의 넘버원 자리에 오른 지 오래다. 90년대 들어 반도체가 대박나면서 국내기업사에서 전무후무한 순이익을 안겨줘 금융 계열사의 그룹 내 비중이 줄어든 듯 보일 따름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도 결국 삼성이 금융업을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2009년부터 본격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전망 등도 삼성이 글로벌 금융사에 대한 M&A에 나서게 할 것이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자통법의 골자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 허용하는 것으로 여러 형태의 금융업을 한꺼번에 다룰 수 있는 금융투자회사 설립이 가능해진다. 지난 6월 3일 국회 통과된 이 법안은 유예기간을 거쳐 2009년 2월 4일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삼성의 글로벌 금융자본 M&A를 통한 금융업 확대설은 그룹의 주력을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전환해 성공을 거둔 GE에 대한 벤치마킹 성격을 지닐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성그룹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가 GE의 사내 대학인 크론토빌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삼성은 GE의 경영기법과 내부혁신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게다가 이 전무 자신도 금융업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전무가 삼성 외곽에서 실험했던 e삼성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준비하는 회사가 몇개 있었을 정도다.
삼성의 국제 금융시장 진출과 관련해서 업계 인사들 사이엔 두 가지 대표적인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전체 자산규모가 100조 원을 웃도는 삼성의 금융계열사들을 동원해 글로벌 금융사 지분을 사들이는 방법과 자통법 시행에 맞춰 삼성증권을 투자은행으로 확장 개편하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적이 부진한 일부 제조업 계열사의 매각도 가능할 것이란 평이 뒤를 따른다. 주력을 금융분야로 돌리기 위해 몇몇 계열사를 팔아넘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정몽구 현대차 회장 | ||
현대차그룹 역시 자통법 시행에 맞춰 그룹의 신 성장동력 중 하나로 금융업을 택해야 한다는 데 업계 인사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금융에서 더 큰 돈을 벌고 있는 점이 현대차의 벤치마킹 사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GE와의 금융 제휴 이후 자동차 할부 금융은 물론 개인 소액대출 시장에서도 힘을 받고 있다. 자동차 할부금융은 주택할부금융과 더불어 할부금융시장에서 양대 축으로 불리는 분야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건설업에도 힘을 쏟고 있는 만큼 할부금융 시장에서만큼은 현대차그룹이 국내에서 슈퍼파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삼성그룹도 할부금융업을 하고 있지만 자동차제조사를 끼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실적을 못따라가고 있다.
얼마 전 업계 인사들 사이에 ‘현대차그룹이 현대증권 인수전에 참여할 것’이란 소문이 나돈 바 있다. 농협의 현대증권 지분 인수에 현대차가 참여할 것이란 이야기가 업계 인사들 사이에 제법 구체적으로 나돌았다가 가라앉기도 했다. 현재 현대차 안팎의 분위기를 봐선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증권 지분 인수에 현대차가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는 평이다.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현정은 회장의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일 당시 정 회장의 묵인설이 잠시 나돌기도 했지만 재계의 여러 인사들은 정몽구 회장이 고 정몽헌 회장 미망인 현정은 회장을 애틋하게 대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향후 몇몇 증권사들이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어 현대차가 증권사 지분구조에 참여할 가능성은 살아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자통법이 본격 시행되는 2009년 2월까지 삼성이나 현대차가 내부 금융 인프라를 다지고 외부 M&A 자원을 개발하는 데 치중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양측 모두 금융업 확대에 대한 부담을 가질 것이란 관측도 업계 인사들 사이에 나돌고 있다. 금융업 강화에 발맞춰 황태자들 위상에 관한 논란이 예상되는 까닭에서다.
삼성의 경우 이건희-이재용 부자 승계문제가 주목받을 때마다 그룹 내 2인자란 평가를 받는 이학수 부회장과의 역학관계가 늘 거론되곤 한다. 이미 이재용 전무의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 등극에 이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 식의 순환지배구조가 지난 90년대 말부터 자리를 잡아 지분 승계에 대한 난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조직 장악 여부다. 올 초 삼성전자 정기인사를 통해 이건희 회장 시대 인사들이 몇몇 물러나고 이재용 전무 인맥이 약진했다는 평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이 전무의 금융계열사에 대한 경영수업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없다. 삼성 금융계열사에 대한 삼성 구조본의 장악력이 전자 계열사보다 높다고 평가받지만 삼성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금융을 지목해 대규모 인수합병전을 진행할 경우 거물급 CEO 영입 여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통법 시행 이후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합친 대형 금융사가 탄생될 경우 이를 이끌게 될 새 수장의 입김이 그룹에서 차지할 비중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럴 경우 이 전무의 경영 이력 관리와 그가 그룹 내 금융계열사에 미칠 영향력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이라 평하는 인사들도 있다.
그룹의 신 성장동력 마련 차원의 금융업 확대가 현대차 정몽구-정의선 부자에게도 난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현대차그룹의 금융업 확대는 일단 그룹의 대표 금융 계열사인 현대캐피탈 중심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정몽구 회장 사위인 정태영 현대캐피탈·현대카드 사장은 정 회장의 신뢰가 남달리 두텁다는 평을 일찍부터 들어왔다.
현대가 장손인 정의선 사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가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룹의 신 성장동력이 될 금융업에서 정태영 사장의 활동무대가 커질 가능성도 많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