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2억여 원 ‘초저예산 영화’에 시각장애 전각 장인 열연…‘출판인 박정민’으로 삶도 1인 2역

“감독님이 처음엔 제게 아들 역할만 주셨어요. 그런데 원작에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많이 나오니까 이 역할도 아들 역 배우가 맡는다면 영화적으로 재밌을 것이란 판단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아들과 젊은 아버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젊은 아버지를 연기하고 싶었고요(웃음). 그때 아직 저 말고는 캐스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 감독님께 ‘젊은 아버지 역 배우를 정해놓으셨느냐’고 여쭤봤더니 저를 간파하셨는지 ‘1인 2역도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웃음). 덕분에 자연스럽게 진행됐죠.”
연상호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실사영화 ‘얼굴’은 앞을 못 보지만 전각 분야의 장인으로 거듭난 임영규(권해효 분)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 분)이 40년간 묻혀 있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박정민은 미스터리를 풀 열쇠를 쥔 인물인 젊은 시절의 아버지 임영규와 현재 시점에서 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좇는 아들 임동환으로 1인 2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임영규를 연기할 때 그는 시야를 희뿌옇게 만드는 특수한 렌즈를 끼고 상대 배우들 또는 주변 사물과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신을 채워냈다. 젊은 시절과 현재 시점의 임영규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재의 그를 연기한 배우 권해효를 참고하면서 동시에 박정민은 실제 시각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뒤, 현재 시점에서 아들 임동환으로서 박정민은 아버지 임영규와 독대해 폭발하는 그의 울분을 맞닥뜨리게 된다. 약 15분 동안 임영규는 자신의 과거사를 읊으며 그간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드는데, 이 클라이맥스 신은 권해효의 애드리브로 만들어진 즉흥연기였다는 게 박정민의 이야기다. 촬영 현장에서 다들 임영규에게 완전히 압도 당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며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권해효 선배님이 그 신을 찍기 전에 정말 아무에게도, 심지어 감독님께도 미리 말씀을 안 해주셨거든요. 처음엔 다들 ‘대사를 까먹으셨나?’ 했는데 다음 테이크에도 똑같이 연기하시는 걸 보고 ‘아, 선배님의 머릿속에는 임영규가 있다’고 깨달았어요. 촬영하는 그 순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임영규의 과거를 알게 되는, 굉장한 마법 같은 시간이었던 거죠. 저 역시 젊은 임영규를 연기했지만 선배님의 그 신을 보고 나서야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제 연기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됐어요.”
2018년 영화 ‘변산’부터 함께하며 긴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상대 배우 신현빈의 연기와 철저한 준비성에 박정민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신현빈은 극 중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임영규의 아내 정영희를 연기했다. 매우 추한 얼굴을 가졌다는 주변인의 말에 신빙성을 주듯, 회상 신에서조차 덥수룩한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 인물이다.

앞서 박정민은 ‘배우 박정민’으로서의 삶에 잠시 휴식기를 갖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취미 생활도 하며 여가를 조금씩 즐기기도 하고, 남는 시간은 ‘출판인 박정민’으로서 동분서주하는 데 쏟아내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서울국제도서전 등 출판계 다양한 행사는 물론, ‘유퀴즈’부터 스타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까지 출연하며 홍보에 힘쓰고 있는 박정민은 출판사 ‘무제’의 어엿한 대표님이기도 하다.
다만 워낙 어려운 출판계의 형편과 달리 신생 출판사임에도 홍보부터 판매까지 ‘시작선’부터 다른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부분에 대해 박정민은 “인지도 있는 사람이 대표라면 남들보다 큰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까, 나의 목소리가 아닌 조금 더 작은 누군가의 목소리의 스피커가 돼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네가 유명하니까 파는 책도 잘되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 알아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요. 하지만 적어도 기존 출판사가 해온 방식을 뒤집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 박정민이니까 이거 해줘’라고는 절대 하지 않고, 다른 서점이나 출판사가 일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고 있어요. 이런 면을 봐주시는 분들도 꽤 많더라고요. ‘쟤는 그래도 편법을 취하진 않는 것 같아, 제대로 하는데?’라고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요. 다만 어딘가에 토라져 계신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분들도 제 일을 예쁘게 봐주실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죠.”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