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포기’…9월부터 작전중
▲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측근과 친인척에 대한 ‘설 특별사면’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일고 있다.사진제공=청와대 |
[일요신문]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말 마지막 사면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형님’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을 비롯해 이 대통령 핵심 측근들이 사면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지난해부터 사면을 위해 필요한 작업을 물밑에서 진행한 정황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정치권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이 대통령의 사면 추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역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사면 문제로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이 충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둘러싼 논란을 따라가 봤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 단행설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7일이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에 연루돼 1·2심에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날이기도 하다. 재판에서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최 전 위원장이 돌연 상고를 포기하자 법조계에선 사면을 염두에 둔 것이란 얘기가 돌았다.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돼야만 특사 대상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업체로부터 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MB의 평생지기’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도 최 전 위원장과 비슷한 무렵 상고 포기서를 제출해 이러한 관측에 더욱 힘이 실렸다.
이러한 사면설에 대해 청와대는 침묵했다. 사면일로 거론되던 성탄절이 지난 후 해가 바뀌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몇몇 기자들에게 “거봐라. 무슨 사면이냐. 임기 중 사면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면설은 오히려 더욱 확산됐다. 설 연휴가 ‘D-day’이고,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이상득 전 의원이 그 전에 1심 선고를 받기 위해 재판을 서두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실제로 최근 법원이 1월 24일 이 전 의원에 대한 1심 선고를 하겠다고 밝히면서 설 연휴 특별 사면대상에 이 전 의원이 포함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 전 의원을 사면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특별사면’ 여론이 확산되자 청와대도 사면 추진에 대해 사실상 시인하고 나섰다. 박정하 대변인은 1월 9일 “각계각층에서 공식·비공식적으로 사면을 탄원하거나 요구하고 있어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박 대변인은 “다만 사면 시기나 대상에 대해서는 특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상은 백지상태다. 누가 되고, 안되고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몇몇 청와대 관계자들은 “(사면권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인데 눈치 볼 게 뭐 있느냐. 설 연휴에 무조건 해야 한다”며 강경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대통령의 설 연휴 사면은 거의 확정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현 정부에서 실세로 불렸던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7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사면 같은 대화합 조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며 여론 떠보기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 최 전 위원장, 천 회장, 이 전 의원 외에도 김윤옥 여사 사촌오빠인 김재홍 전 KT&G 이사장,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최영 전 강원랜드 사장 등이 사면 대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이 중 최영 전 사장(징역 3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제외하곤 공교롭게도 모두 상고를 포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재홍 전 이사장은 지난해 9월, 신재민 전 차관은 지난해 12월 상고를 하지 않고 수감됐다. 지난 10일 1심 공판에서 3년 구형을 받은 이 전 의원 역시 1월 24일 1심 판결이 나올 경우 상고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최 전 위원장, 천 회장 등은 하나같이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상고는 하지 않았다. 이는 납득하기 힘든 처신일 뿐 아니라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 그 과정이 흡사하다. 누군가가 재판을 받는 이들에게 ‘코치’를 해 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
정치권에선 사면과 관련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민정수석실에서 김재홍 전 이사장이 상고를 포기한 지난해 9월부터 사면을 대비한 물밑 작업을 추진해 왔을 것이란 얘기다. 이에 대해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최시중 천신일 김재홍 등은 우리가 관리하는 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에 재판 등에 상당한 관심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사면을 대비해 상고를 포기하라는 식의) 교감은 없었다”며 ‘사면 추진설’을 부인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청와대의 사면 추진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등 권력남용을 통한 비리 사건 연루자들을 위한 맞춤형 특사”라면서 “이 나라가 법치국가인지 의심하게 하는 일”이라며 신랄하게 꼬집었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도 “정권 말기에 풀어주고 튀는 ‘풀튀 정권’이다. 사면법 전면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야권은 이 대통령이 지난 2009년 6월 라디오 연설에서 “제 임기 중에 일어난 사회지도층의 권력형 부정과 불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표명한 부분을 부각시키며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새누리당에서조차 사면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친박계 이혜훈 최고위원은 10일 “사면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하지만 이도 국민 상식에 부합하게 행사해야 한다. 이상득 전 부의장의 경우 아직 1심 재판이 진행 중인데 사면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직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른 자신의 친인척을 직접 특별사면을 해 준 전례는 없다”라고 비판했다. 친이계 심재철 최고위원도 “법 집행의 형평성에 저해되는 것으로 부패토양을 스스로 만들고 법치주의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새누리당은 이 대통령이 사면을 강행할 경우 박근혜 당선인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벌써부터 민주통합당은 “특사에 친박계 인사들이 포함됐는지, 물밑 협의가 진행됐는지를 분명히 밝혀주길 바란다”며 박 당선인을 향해 포문을 열고 있다. 이 대통령이 박 당선인과의 합의 없이 사면을 추진하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박근혜 당선인은 임기 마감이 목전인 현직 대통령이 법치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를 바로 세워야 하고, 그 책임은 차기 정부를 이끌 박 당선인에게 있다”면서 박 당선인을 압박했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사면 논의가 달아오르면 오를수록 박 당선인이 침묵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당선인 측의 고민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박 당선인의 한 측근은 “사면을 두고 마치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이 합의한 것처럼 오해를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사면권을 제한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게 박 당선인의 소신이다. 이번 사면 역시 반대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고 귀띔했다. 친박계 의원들이 특별 사면에 부정적인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선 것도 이러한 박 당선인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박 당선인이 직접 입을 열기에도 어려운 문제라는 게 친박 인사들의 ‘딜레마’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사면권은 엄연히 현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에서다. 최대한 조용히 정권 인수 작업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는 박 당선인이 현 정권와의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앞서의 친박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제어할 생각도, 또 그럴 권한도 없다. 다만, 논란이 있는 인물은 이번에 빼고 갔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전했다.
박 당선인 측의 이러한 기류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이 전 의원을 포함한 측근 사면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사면에 대한 공식 브리핑에서도 청와대 측은 “박근혜 당선인 측과 협의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차기 정부와의 갈등을 불사하고서라도 사면을 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박 당선인이 권력형 비리 연루자에 대한 사면에 부정적인 뜻을 강조해와 차기 정부에선 이 전 의원 등의 사면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욕을 먹어도 이 대통령이 먹는다. 퇴임 전에 다 털고 가야 박 당선인에게도 부담이 안 간다. 이러한 우리의 뜻을 박 당선인에게 전할 것이고, 설령 (박 당선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