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반성’ 안했고 정 ‘참을성’없었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독일의 유명 저술가 볼프 슈나이더가 자신의 저서 <위대한 패배자> 말머리에 남긴 말이다. 슈나이더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분명 빛나는 승자보다 좌절한 패자가 더 많다. 지난 18대 대선에서도 7명 입후보한 후보 중 승자는 박근혜 단 한 사람이었다. 특히 유권자 절반에 가까운 48%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석패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전 후보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루저’다. 하지만 본인이 밝혔듯,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낙선의 고배를 마신 수많은 정치 선배들이 있었다. 그 선배들의 낙선 후 행보를 잘 살펴보면 문 전 후보의 ‘길’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대선 출마자들의 ‘실패와 성공학’을 들여다봤다.
# 대선 루저계의 살아있는 신화, 이회창
▲ 이회창 전 총재. 일요신문 DB |
이 전 총재의 패배 후 행보는 한마디로 차기 대선을 위한 ‘준비 과정’의 연속이었다. 우선 첫 번째 패배였던 15대 낙선 이후 그는 정치계를 뜨지 않았다. 당시 그는 대권 재도전이라는 야망을 굳이 숨기진 않았다. 그는 ‘틈’을 기다렸다. DJ정부 초기 몰락의 길을 걷던 한나라당의 사정은 도리어 그에게 ‘기회’였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8년 6월 지방선거 대패 이후 그는 당 분열의 틈을 타 다시금 당 총재로 복귀한다.
하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그와 당 내부에서 비롯된 ‘세풍’ ‘총풍’ ‘병풍’ 등 이른바 ‘삼풍(용어설명 참조)’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뒷전이었다. 16대 대선 직전에는 823억 원 규모의 차떼기 사건과 그가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대쪽’이라는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논란거리에 대해 MB처럼 적극적인 해명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첫 번째 패배 이후 반드시 선행돼야 했던 ‘털어내기’와 ‘위기관리’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훗날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여기에 15대 대선 패배 이후 보여준 그의 용인술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사실 그의 15대 대선 패인 중 하나는 YS와의 거리두기에 있었다. 그의 YS 거리두기는 가히 광적인 수준이었다. 1997년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IMF사태 이후 이 전 총재는 YS정부와의 연속성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같은 당이라도 눈앞에 있는 당선이 우선이었다. 여러 가지 방책을 생각하던 중 이 전 총재는 측근으로부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받는다. YS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는 것. 결국 이 전 총재는 대선 직전 끔찍한(?) 퍼포먼스를 대중 앞에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거리두기는 이인제 경선 불복과 탈당, 신당 창당 후 대선 도전이라는 악재를 만들었고 결국 결과는 패배였다. 15대 패배 이후에도 이 전 총재는 YS및 상도동계와 거리두기를 관두지 않았고 결국 16대 대선에서 상당수 보수 영남층 표심을 빼앗기게 된다.
16대 대선 패배 이후,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곧바로 일본을 경유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그는 스탠퍼드대 교환교수 자격으로 1년가량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당시 함께 낙선한 정몽준 의원과 동일시기 같은 곳에 머물렀다. 정작 본인은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DJ의 선례가 있었기에 정치권 안팎에서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2003년 영구귀국 이후에는 이 전 총재가 자신과 가까운 박근혜를 끌어들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장인의 빌딩에 개인 사무실을 개소했다. 그리고 그 즈음 이 전 총재는 한 가지 기이한 일을 벌인다. 멀쩡한 선친의 묘를 인근 선산으로 옮겼던 것. 알고 보니 선친의 묘가 이장된 곳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전과는 비교될 수 없는 명당으로 자손의 길운과 연결되는 지세였다. 그가 선친의 묘까지 옮겼다는 것은 결국 대권에 대한 열망이 절박하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이 전 총재는 차츰차츰 세 번째 대선을 준비했다.
2006년 박근혜 커터칼 테러 사건 직후에는 서서히 ‘이회창 스페어 후보론’이 나오면서 분위기를 잡아갔다. 결국 2007년 11월, 내심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패배한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하며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막판까지 기대했던 박근혜 영입은 성사되지 않았고 무소속 후보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했다. 결과는 세 번째 낙선이었다.
# 대선 패배 후 급락한 정동영
▲ 정동영 상임고문. 일요신문 DB |
정동영 고문은 17대 대선 참패 이후 한 없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옛 열린우리당 시절 현역 의원만 60~70명에 달했던 정동영계 의원들은 16대 대선 패배 직후 이듬해 4월에 있었던 18대 총선에서 대부분 낙천 및 낙선되는 대 살상을 당했다. 총선을 통해 재기를 모색했던 정 고문 본인도 정몽준 의원에게 밀려 실업자 신세가 됐다. 결국 그는 총선 패배 직후인 그해 6월 듀크대 초정교수 자격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정동영 고문의 휴식기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2009년 초, 조기 귀국설이 대두되면서 총선 재보궐 선거에 나선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실제 정동영 고문은 유학길에 오른 지 불과 반 년 만에 슬그머니 귀국을 감행했다. 대선 패배론에 대한 자성과 반성보다는 원내 복귀를 통한 본인의 재기가 우선이었다.
당시 당 대표였던 정세균 고문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당시 한창 재정비에 나서고 있었던 민주당 입장에서 정동영 고문은 ‘불청객’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정동영 고문은 당 공천에서 배제됐고 무소속 출마(전주 덕진)를 감행, 원내 복귀에 성공하며 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 그의 당내 입지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2010년 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며 재기에 나서지만 19대 총선(서울 강남을)에서 다시 한 번 고배를 마신다. 상대는 고작 초선이었던 김종훈 의원이었다. 현재 당 고문직으로 물러나 있는 정동영 고문은 이미 ‘용도폐기’된 인사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이다.
# 루저에서 위너로 거듭난 DJ
▲ DJ가 9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모습. |
문재인 전 후보에게 귀감이 되는 패배자도 존재한다. 바로 대권 도전 4전 5기만에 위너로 거듭난 DJ다. 문 전 후보는 대선 패배 직후 이희호 여사를 예방했다. 이 여사는 이 자리에서 싱긋 웃으며 “우리는 몇 번 떨어졌다. 문 후보는 겨우 한 번 아니냐”며 위로했다고 한다. DJ는 1992년 14대 대선에서 숙명의 라이벌 YS에게 패배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26일, 거의 쫓겨나다시피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세계적 석학들이 즐비한 케임브리지대학 객원 연구원 자격이었다.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옥스퍼드에선 빌 클린턴이 공부했고, 케임브리지에선 이제 김대중이 공부하게 됐다”며 격하게 환영했다고 한다.
DJ는 그곳에서 자신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발판삼아 세계적인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더더욱 내공을 다지게 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존 던 교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교수 등과 교류했으며 평소 친분이 깊었던 남아공 만델라 대통령, 필리핀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등과도 연락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국내 정치 현황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유학시절 케임브리지에는 이기택, 이종찬, 이해찬, 정대철, 김태랑, 설훈 등 국내 정치인들이 수시로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계 은퇴를 번복하며 그해 7월,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
그가 유학 6개월 만인 1993년 7월 4일 국내로 돌아왔을 때, 한반도는 북핵 실험으로 인해 전운이 감돌았다. 어찌 보면 이러한 위기상황이 DJ에게는 기회였다. DJ가 정치적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곳은 아태평화재단이었다. 1994년 6월 북핵위기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당시 남북위기의 전환점이 됐던 카터 방북은 DJ와 아태평화재단 작품이었다. YS와는 차별되는 그의 국제적 위상과 실력이 인정받는 대목이었다.
이후 그는 1995년 9월 신당(새정치국민회의)을 창당하며 국내 정계에 복귀한다. 물론 대권 도전으로 가는 길은 이후에도 꽤나 복잡했다. DJP연합 결성 당시 잡음은 물론 15대 대선 직전까지 14대 대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20억 비자금 외에 알파가 존재한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엎어질 것 같았던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운도 따랐다.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이 대선 이후로 비자금 수사를 연기했던 것. 결국 루저의 대명사였던 DJ의 4전 5기 대권 도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인동초’라는 그의 별칭답게 무척이나 고된 여정이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삼풍’이란?
▲총풍-1997년 15대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북한 측에 판문점 내 총격시위를 요청했던 사건. 이는 당시 검찰 조사에 의해 밝혀졌으며 북한 측의 거절로 실행은 무위에 그쳤다. 실제 그해 10월, 이회창 후보 측 인사들은 중국 베이징에서 이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박충 당시 참사를 만나 이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세풍-15대 대선을 앞두고 이석희 당시 국세청 차장이 현대, SK 등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166억 원에 해당하는 여당의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사건이다.
▲병풍-15대 대선을 앞두고 터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이정연, 이수연)의 병역비리 의혹.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병역브로커 김대업의 구체적인 증언까지 나오면서 대선판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법정에서 두 아들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총풍-1997년 15대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북한 측에 판문점 내 총격시위를 요청했던 사건. 이는 당시 검찰 조사에 의해 밝혀졌으며 북한 측의 거절로 실행은 무위에 그쳤다. 실제 그해 10월, 이회창 후보 측 인사들은 중국 베이징에서 이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박충 당시 참사를 만나 이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세풍-15대 대선을 앞두고 이석희 당시 국세청 차장이 현대, SK 등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166억 원에 해당하는 여당의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사건이다.
▲병풍-15대 대선을 앞두고 터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이정연, 이수연)의 병역비리 의혹.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병역브로커 김대업의 구체적인 증언까지 나오면서 대선판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법정에서 두 아들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문재인 향후 행보는
‘재수’보단 ‘밀알’에 무게
루저 문재인 전 후보의 재기와 대권 재도전은 과연 가능할까. 문 전 후보는 지난해 12월 30일, 5·18묘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 민주당이 거듭나고 국민의 정당으로 커나가는 데 힘을 보태겠다”며 우회적으로 재기 의지를 내비쳤다.
현실적으로 문재인 전 후보의 대권 재도전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대선 패배 이후 당내에서는 친노 심판론이 대두되고 있고, 그 책임소재에 있어서 문 전 후보는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기회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노 그룹을 대표해 나온 신계륜 의원은 1차 경선에서 47표를 얻었다. 결국 2차 결선에서 낙선했지만 ‘47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여전히 당내 주류세력인 친노가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대표는 “친노는 여전히 당내 주류 핵심 세력이다. 문재인 역시 아직 현역 의원이다. 또 다음 총선은 너무나 멀었다. 이게 현실이다. 지금은 타이밍상, 앞으로 나설 수 없다하더라도 슬그머니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7대 대선 직후 18대 총선 공천에서 측근이 대거 탈락했던 정동영 고문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 전 후보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지적도 많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야권에 대한 국민들의 ‘해체’ 명령과도 같다. 현재 비대위 체제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전면해체와 야권 재구성이만이 다음 대선을 바라보는 희망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친노그룹의 퇴진과 쇠락은 민주당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문 전 후보도 이 과정에서 차기 후보를 위해 밀알역할을 할 것이란 게 설득력을 얻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재수’보단 ‘밀알’에 무게
▲ 대선 시민캠프 해단식에 참석한 문재인 전 후보. 박은숙 기자 |
루저 문재인 전 후보의 재기와 대권 재도전은 과연 가능할까. 문 전 후보는 지난해 12월 30일, 5·18묘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 민주당이 거듭나고 국민의 정당으로 커나가는 데 힘을 보태겠다”며 우회적으로 재기 의지를 내비쳤다.
현실적으로 문재인 전 후보의 대권 재도전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대선 패배 이후 당내에서는 친노 심판론이 대두되고 있고, 그 책임소재에 있어서 문 전 후보는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기회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노 그룹을 대표해 나온 신계륜 의원은 1차 경선에서 47표를 얻었다. 결국 2차 결선에서 낙선했지만 ‘47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여전히 당내 주류세력인 친노가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대표는 “친노는 여전히 당내 주류 핵심 세력이다. 문재인 역시 아직 현역 의원이다. 또 다음 총선은 너무나 멀었다. 이게 현실이다. 지금은 타이밍상, 앞으로 나설 수 없다하더라도 슬그머니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7대 대선 직후 18대 총선 공천에서 측근이 대거 탈락했던 정동영 고문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 전 후보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지적도 많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야권에 대한 국민들의 ‘해체’ 명령과도 같다. 현재 비대위 체제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전면해체와 야권 재구성이만이 다음 대선을 바라보는 희망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친노그룹의 퇴진과 쇠락은 민주당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문 전 후보도 이 과정에서 차기 후보를 위해 밀알역할을 할 것이란 게 설득력을 얻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