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역사의 산 증인…“이순재 선생님의 우산 아래 덕 보지 않은 배우 없을 것”

사회는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2009)에서 사위 역할로 호흡을 맞춘 배우 정보석이 맡고, TBC 시절부터 연을 맺은 배우 김영철과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2012)에서 함께한 배우 하지원은 추도사를 했다. 하지원은 오랜 연기 생활 동안에도 팬클럽이 없다는 이순재의 이야기에 직접 팬클럽을 만들어 회장직을 맡아왔다.
정보석은 "이순재 선생님은 연극, 영화, 방송 전반에서 늘 본보기가 돼주신 분이며 방송 문화계 연기 역사를 개척해온 국민배우"라며 "배우라면 선생님의 우산 아래에서 덕을 입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고인을 기렸다.
하지원은 "작품을 하며 스스로 흔들렸던 시기 선생님께 '연기는 왜 할수록 어려운가요?'라고 조심스레 여쭌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잠시 저를 바라보시고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인마, 지금도 나도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며 "그 한마디는 제게 큰 위로이자 오랜 시간 마음을 지탱해 준 가르침이었다. 선생님은 연기 앞에서 누구보다 겸손했고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1934년생인 이순재는 11월 25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역 최고령 배우로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는 지난해 말부터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었다. 2024년 10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출연 당시 건강이 악화돼 주치의로부터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이순재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회복에 힘써 왔다.
이 와중에도 지난해 연말 'KBS 2024 연기대상'에 참석해, 그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 '개소리'로 역대 연기대상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이순재는 수상 소감을 통해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며 "이 자리까지 와서 격려해주신 여러분과 지금 TV로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는 뭉클한 소회를 남겼다. 이 말은 고인의 마지막 공식석상 발언이 됐다.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 진학 후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하고, 연극 집단 '떼아뜨르 리브르'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대학 졸업 이후엔 동료 연극인들과 함께 국내 최초 동인제 극단인 '실험극장'을 창단해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드라마 대표작으로는 '사랑이 뭐길래'(1991), '목욕탕집 남자들'(1995), '허준'(1999~2000), '거침없이 하이킥'(2007), '지붕뚫고 하이킥'(2009), '욕망의 불꽃'(2010~2011), '돈꽃'(2017) 등이 손꼽힌다.
영화 '그 땅의 연인들'(1963)로 스크린으로도 무대를 넓히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2009년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업'(Up)에서 주인공 칼 할아버지의 더빙 성우로 익숙한 그는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덕구'(2018), '대가족'(2024) 등을 통해 관객들을 울리고 또 웃게 만들었다.
말년에는 그의 연기 생활의 시작점이었던 무대로 다시 돌아가 관객들과 직접 호흡했다. '세일즈맨의 죽음'(2016), '앙리 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 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의 명작이다. 활동 중단 직전까지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와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통해 열연을 펼쳤다.
긴 연기 생활 중 잠시 정치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며 다시 '천생 배우'로서의 자리로 돌아왔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이순재는 이후 "정치인 생활을 하는 내내 하늘이 파란 줄도, 꽃이 아름다운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다시 정치 제의가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나의 길은 연기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연기밖에 없었다. 정치를 더 한다고 해서 잘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있을 때 연기자로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답했다.
마지막까지 배우로서 몸을 불태운 이순재는 경기 이천 에덴낙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정부는 고인이 세상을 떠난 11월 25일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