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 공들일 때 뒤통수 맞은 거야?
정 회장은 여수 박람회 유치를 위해 전 세계에 뻗어 있는 현대·기아차 조직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던 것은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과도 무관하지 않다.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을 둘러싼 논란을 국가적 행사 유치 공적으로 잠재울 계기가 마련된 동시에 대법원 판결에서의 감형 또한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정 회장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을 외치기엔 아직 일러 보인다는 지적이다. 정 회장 앞엔 아직도 넘어야 할 높은 산이 여러 개 놓여있는 까닭에서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 회장은 지난해 4월 한때나마 구속수감을 당한 데 이어 올 2월 1심에서 3년 실형 선고를 받은 후 9월 항소심에서 겨우 집행유예·사회봉사명령을 선고받았다. 비슷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1심 2심 모두 집행유예를 받고 나서 특별 사면된 두산 박용성-박용만 형제나 항소심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삼성에버랜드 측 인사들과의 형평성 논란이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정 회장 집행유예 판결이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판결’ 논란을 불러온 만큼 정 회장에겐 그 대가를 치를 계기가 필요했다. 가뜩이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낭패를 겪은 현 정부의 마지막 치적이 될 수도 있고 또 13조 원의 경제효과가 예상되는 세계박람회 유치 건에 유치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서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항소심 판결 직전 정부와 현대차 고위관계자가 만나 정 회장의 여수 유치 활동을 위한 감형 논의가 오갔다는 소문 역시 정·관·재계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수 박람회 유치 성공으로 현대·기아차그룹은 쾌재를 불렀지만 그렇다고 비자금 사건 여파가 모두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아직은 집행유예 상태인 만큼 대법원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 데다 몇가지 새로 불거진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최근 다시 터진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와의 불편한(?) 관계 해결이 정 회장에겐 재판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지난 1월 공정위가 독과점 남용 혐의로 현대차에 216억 원의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렸으며 현대차가 지난 7월 법원에 불복 소송을 낸 바 있다. 그런데 11월 15일 공정위는 다시 현대차와 기아차가 중소기업을 상대로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일삼은 것 등을 적발해 16억 90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안 그래도 항소심 집행유예로 재벌 봐주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터라 정부기관과의 마찰을 피하고픈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그렇다고 내미는 과징금마다 무조건 고개 숙이며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타들어갈 법도 하다.
게다가 공정위가 정몽구 회장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글로비스의 물류사업을 돕는 데 전 계열사가 나선 점을 지적한 것이 못내 아플 것으로 보인다. 글로비스는 정의선 사장이 지분 31.88%를, 정몽구 회장이 25.66%를 보유한 물류계열사로 이 회사에 대한 계열사들의 물량지원을 통한 사세 확장이 문제가 됐다. 그룹 내 부당 지원으로 몸집을 키워 상장할 경우 그 주가차익으로 정 사장이 턱없이 부족한 핵심계열사 지분을 확충해 경영권 승계 기반을 다지려 할 것이란 지적을 받아온 바 있다. 지난해 현대차 비자금 사태 수습방안으로 정 회장 측이 내놓은 8000억 원 사회환원 약속도 글로비스 지분 출연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 부자 입장에서 초고속 성장 중인 글로비스의 지분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 사장은 기아차 지분 1.99% 외엔 그룹 경영권 장악에 필요한 핵심계열사 대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지 못한 상황이라 글로비스 상장을 염두에 둔 핵심계열사 지분 매입 시나리오를 거두기가 쉽지 않은 셈이다.
정 회장은 지난 11월 21일 자신의 글로비스 지분 92만여 주(지분율 2.46%)를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에 증여했다. 항소심 판결을 받으면서 약속한 사회공헌활동 이행인 동시에 글로비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완화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 회장이 바쁜 여수 유치 일정 속에서도 계열사들 중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진 현대제철 관련 구설수도 정 회장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 사안이다. <일요신문>은 지난 811호(12월 2일자)를 통해 ‘포스코가 자사에서 퇴직하고 나서 현대제철로 건너간 직원 두 명을 기술유출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는 내용을 단독보도한 바 있다. 포스코의 고소 이후 이를 조사해온 검찰이 결국 해당 직원 두 명을 불구속 기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철설비 기술을 보유한 포스코 출신 현대제철 직원들의 기술 유출 여부가 결국 법정공방으로 가려지게 된 셈이다.
박람회 유치 활동을 끝내자마자 제일 먼저 손 댄 굵직한 일이 바로 현대제철과 독일 티센크루프스틸(TKS)과의 제철 조업기술 협력 계약 체결이었을 정도로 정 회장의 제철업 사랑은 남다르다. 검찰은 해당 직원들에 대한 수사일 뿐 현대제철에 대한 회사 차원의 수사는 아니라고 밝히지만 정 회장이 애정을 쏟아온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건설이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람회 유치로 ‘역시 의리의 돌쇠’라는 평을 받은 정몽구 회장이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궁금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