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층 눈도장 → ‘승진이 눈앞에’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삼성이 ‘차명계좌 부여가 곧 조직 내 입지 강화를 뜻한다’는 식으로 계좌 보유에 대한 자부심을 부여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김용철 변호사가 밝혔다시피 전략기획실과 계열사에 포진한 주요 임원들이 대상자였지만 종종 임원 승진을 앞둔 부장급 인사들에게도 동기유발 차원으로 차명계좌가 할당됐다고 한다.
기술직보다는 관리파트에 있는 인사들이 주 대상자였다. 이들에 대한 계좌 부여는 ‘최고위층이 당신을 눈 여겨 보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다가올 정기인사에서의 임원직 입성 가능성을 뜻해왔다고 한다. 그만큼 삼성 내에선 차명계좌 개설 여부가 조직에서의 향후 입지를 가늠할 기준이 됐다는 전언이다.
차명계좌 관리로 인해 발생되는 이자에 대한 세금 같은 일들은 모두 조직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해당 계좌 보유로 인해 금전적 피해를 볼 일은 절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증권 압수수색 과정에서 차명계좌 할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전자우편들이 대거 발견된 것처럼 차명계좌를 받은 직원들이 모두 달갑게만 여겼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특히 명예욕보다는 물욕에 어두운 인사들 때문에 종종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차명계좌를 받은 인사들 중 일부가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에 돈이 들어있다는 점을 이용해 회사를 협박한 사례가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일부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은 탁월한 협상수완을 발휘해 차명계좌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계좌에 들어있는 돈의 절반을 얻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온다.
이 같은 경우는 최고위층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삼성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삼성 총수일가의 재산을 차명관리하고 있다는 구설수에 줄곧 올라왔다. 항간에는 이 인사가 삼성 최고위층과 갈등을 빚어 자신 명의로 돼 있던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를 바꿔버린 뒤 잔고를 모두 인출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물밑으로 달래고 협박해도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비상장 계열사의 개인주주 지분의 대부분이 차명주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삼성생명 공시에 따르면 이수빈 현명관 이학수 이용순 등 삼성 전·현직 고위임원들(특수관계인) 몫의 지분율만 6.08%에 이르며 소액주주들을 제외한 기타 개인주주 지분율은 11.74%다. 이 회장 개인 지분(4.54%)에 각 계열사 지분율을 다 합하면 29.53%다. 김 변호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건희 회장은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삼성생명 지배권 유지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
김용철 변호사와 검찰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차명 의심 계좌의 수는 1000개 이상이며 한 계좌당 최소 10억 원 이상이 예치돼 있었다고 하니 최소 1조 원 이상의 돈 차명관리 의혹을 받는 셈이다. 검찰이 비자금 수사에만 전념하겠다고 한 이상 1조 원이란 거금은 당분간 비자금으로 활용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원주인이 당장 회수할 수도 없는 돈이 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1조 원 이상의 돈 중 상당액이 국고에 환수되거나 삼성의 자발적 사회환원 금액으로 쓰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