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봤던 사람’에서 ‘처음 본 사람’으로 진술 번복…또 다른 유죄 근거인 피의자 자백엔 모순점 많아
남자는 엄마의 가슴에 맥가이버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돈 갚아.”
엄마는 “못 갚는다”며 방 안으로 도망쳤다. 남자는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와 엄마를 찔렀다. 그러고는 금고에서 돈을 꺼내 가방에 넣고 도망쳤다. 스포츠 머리의 남자는 며칠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은 범인을 “가게에 3번이나 왔었고 아버지와 술도 마셨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 경찰 조사에서도 그렇게 진술했다.
그런데 이틀 뒤 현장 인근에서 잡힌 범인은 이 진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체포된 남자는 만 20세의 탈영병 이민형. 피해자 가족과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 타인이었다. 이 씨는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 끝에 자백했으나 1심 선고 이후부터 현재까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관련기사 “죽어도 죽이지 않았다” ‘대구 장미비디오 사건’ 무기수 이민형, 28년 만에 재심 청구).
#수사 초기엔 면식범 소행 의심

A 군의 진술조서(1998. 1. 3.자)
문: 진술인은 목격할 당시 상황을 상세히 말하시오.
답: 제가 방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고 어머니가 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고 있던 중 20대로 보이는 남자 1명이 들어와 저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검정계통의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접는 칼(일명 맥가이버칼)을 가지고 어머니 가슴에 들이대고 “돈을 갚아라” 하자 저의 어머니가 “돈을 갚지 못한다” 하며 제가 있는 방으로 도망하여 들어오자 뒤를 따라 들어와 어머니 가슴 및 옆구리 부분을 가지고 있던 칼로 찌르고 다시 가게로 나가 돈통에 있던 돈을 꺼내 들고 왔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수사기록 29쪽)
문: 진술인은 어머니를 칼로 찌른 20대 남자를 보면 알 수 있는가요.적어도 사건 직후 A 군의 기억 속 범인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범인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경찰이 아버지에게 한 질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답: 알 수 있습니다.
문: 진술인 20대 남자를 평소 알고 있었는가요.
답: 며칠 전에도 가게에 왔었습니다.
(수사기록 29, 30쪽)
피해자 남편의 진술조서(1998. 1. 3.자)경찰은 “범인이 돈을 갚으라고 했다”는 A 군의 진술을 토대로 부부의 채무 관계를 파악했다. 피해자의 남편은 건설업에 종사했고 피해자는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먹고 사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4000만여 원의 빚도 졌다.
문: 진술인의 아들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진술인의 가게에 3번이나 온 사람으로 얼굴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요.
답: 지금 조사관의 이야기를 듣고 3번 왔다는 이야기를 처음 알았습니다.
문: 아들은 범인이 진술인의 집에 와서 가게에서 진술인과도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요.
답: 우리 애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 말은 믿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사기록 49쪽)
문: ㅇㅇ건업(사채업자)에서 이자나 원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지 않았나요.
답: 지금부터 약 5개월 전에 ㅇㅇ건업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알고 있었는데 그 뒤에 약 2~3개월 전까지 계속 독촉을 받다가 처가 골치가 아픈지 담보로 잡혀 있는 주택을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한 뒤부터는 독촉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수사기록 43, 44, 45쪽)
문: 진술인이나 처가 ㅇㅇ건업으로부터 협박이나 강요를 당하지 않았나요.경찰은 채무관계 외에 피해자 부부가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는지도 확인했다.
답: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ㅇㅇ건업 주인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이것들이 까불고 있어”라며 주택을 팔아 치우겠다는 말을 몇 차례 했고… 나머지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수사기록 45쪽)
문: 진술인이나 처가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나요.처음엔 경찰도 채무관계에 의한 면식범 소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틀 뒤인 1월 5일부터 수사 흐름이 바뀌었다. 경찰이 현장 인근에서 탈영병 이민형 씨를 거동 수상자로 체포하면서부터다. 당시 경찰은 체포 당시 흉기를 소지하고 있던 이 씨를 이 사건 범인으로 강하게 의심했다.
답: 처나 저는 원한을 살 만한 관계가 있는 사람은 없고 약 5개월 전에 박ㅇㅇ이란 사람이 노임 54만 원을 받으러 왔는데 돈을 주지 못하니까 부인과 같이 와서 가게에 앉아서 돈을 줄 때까지 못 가겠다면서… 서로 멱살을 잡고 밀고 당기다가 제가 뺨을 때렸으며 약 1개월 전쯤 그 사람이 저의 가게에 온 것을 처로부터 꾸중을 듣고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사기록 46, 47쪽)
당초 난항을 겪던 수사는 이 씨 체포 이후 급물살을 탔다. 곧바로 밤샘 조사가 시작됐다. 이 씨는 이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경찰관들 앞에서 나체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설상가상 방송사 카메라까지 들이닥쳤다. 결국 이 씨는 자백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진다. 수사와 재판에서 초기 진술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다. 통상 법원도 기억의 휘발성을 인정해 진술 내용이 조금 달라지는 부분은 고려한다. 하지만 “3번이나 봤던 사람”이 “처음 본 사람”이 되는 건 단순히 기억이 흐려지는 것과는 다르다.
이 사건 이민형 씨의 변호인인 박준영 재심 전문 변호사는 이 대면 방식 자체가 식별 절차의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갑이 채워진 피의자를 보여주는 순간, 아이에게는 수사기관이 이미 결론을 냈다는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권위 있는 어른이나 수사기관, 가족이 특정 결론을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확인을 거듭하면, 아이가 그 내용을 자신의 기억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 군은 수사 초기 자신이 본 범인의 특징을 충분히 기록하거나 묘사하는 절차 없이 곧바로 이 씨와 대면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어른들이 제시하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기억을 구성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이 씨와 대면 당시 A 군에게 보여줬다는 촬영 영상이 무슨 내용인지는 수사 기록에 적혀 있지 않았다. 박 변호사는 “영상의 내용에 따라 A 군 진술의 신빙성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며 “만약 자백 장면이 담긴 영상이었다면, 일곱 살 아이에게는 이 씨가 범인이라는 강한 암시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했다.
#목격자 진술과 닮아간 자백
이 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근거는 이 씨의 자백과 A 군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사 기록을 보면 A 군의 진술과 이 씨의 자백은 처음부터 일치했던 것이 아니라 수사와 재판을 거치며 점차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다. 사건 직후 A 군이 경찰에 진술한 범인은 가게에 세 차례 왔던 인물로, 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고 있던 피해자를 칼로 위협한 후 피해자가 방 안으로 도망치자 뒤따라 들어와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적혀 있다. A 군은 1998년 1월 12일 현장검증과 1월 22일 군 경찰 조사에서도 범인의 동선에 대해 같은 내용으로 진술했다.

가방에 대한 진술도 바뀌었다. 1회 신문조서와 현장검증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가방이 2회 신문조서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이 씨는 “처음 진술할 땐 ‘가방과 옷가지를 대구역 사물함에 보관했다’고 했는데 이후 수사관이 불러 ‘피해자의 아들이 범인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해서 다시 ‘그 말이 맞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과 낙동강변 살인사건 등 재심 사건을 심리한 법원들이 허위자백 가능성을 판단할 때 주목했던 점과 비슷하다. 당시 법원들은 수사를 거듭할수록 자백 내용이 변하거나 구체화된 것에 대해 ‘피의자가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순을 제거하고, 범행 당시 현장 및 객관적 정황에 진술을 끼워 맞추는 과정’으로 봤다.
이렇게 이 씨의 자백 내용이 바뀌었다. 사건 7개월 뒤 A 군의 법정 증언도 또 한 번 달라졌다.
A 군의 법원 증인신문조서(1998. 8. 11.자)
문: 당시 증인은 방 안에 짜파게티를 먹고 TV를 보고 장난감을 갖고 놀았나요.
답: 장난감을 쥐고 있었습니다.
문: 엄마가 방 밖에 있다가 방에 들어왔나요.
답: 방 안에 있었습니다.
문: 그 전에 피고인과 엄마가 홀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나요.
답: 예.
(공판기록 145쪽)
문: 범인이 들어올 때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A 군은 이후 이뤄진 추가 현장검증에선 범인이 들어올 당시 피해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시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다.
답: 부엌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습니다.
(공판기록 146쪽)

반면 박 변호사는 이 사건 유죄 판단이 목격자 진술과 피의자 자백에 기대고 있는 만큼, 두 증거의 신빙성을 재심에서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A 군의 진술과 이 씨의 자백은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달라졌고, 가방 소지 여부나 현장의 지문·혈흔 등 객관적 물증과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범인 지목과 자백이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진술과 자백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 2월 9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했다. 법원은 심리를 통해 이 사건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