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9억 원대 주주대표소송 청구 기각…법원 “이사진 선관주의의무 위반 인정 어려워”

2024년 9월 영풍·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해 주식 공개매수에 나섰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이에 맞서 같은 해 10월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의했다. 매수가격은 주당 89만 원으로 경영권 분쟁 이전 56만 원 안팎이던 주가를 크게 웃돌았다. 고려아연은 자사주 204만 30주를 약 1조 8156억 원에 취득했다.
영풍은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회사 자금으로 자사주를 지나치게 비싸게 사들여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사진이 회사 이익을 우선해야 할 선관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영풍은 2024년 11월 소송을 제기한 뒤 청구액을 약 6732억 원에서 8369억 원대로 늘렸다.
재판부는 이사들이 법령을 준수하며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수집·검토하고 회사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고 결정을 내렸다면 그 판단이 현저히 불합리하지 않은 한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봤다. 이른바 경영판단의 원칙이다.
재판부는 이사진이 영풍 측 공개매수를 회사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외부 법률자문과 가처분 결정 등을 검토했다고 판단했다. 공개매수가격의 할증 수준과 자금조달 방안까지 고려해 내린 결정도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자사주 취득에 특정목적 임의준비금을 사용한 행위가 상법과 정관을 위반했다는 영풍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풍은 공개매수 당시에도 이를 중단해 달라며 두 차례 가처분을 신청했으나 2024년 10월 2일과 21일 모두 기각됐다. 당시 영풍·MBK도 공개매수가를 주당 66만 원에서 75만 원, 다시 83만 원으로 올렸다. 법원은 10월 2일 1차 가처분 결정에서 영풍 측이 매수가격을 66만 원에서 75만 원으로 올린 점을 들어 고려아연의 적정 주가를 명확히 산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가처분은 공개매수 중단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로 이번 손해배상 본안소송과 구분된다. 10월 21일 2차 가처분 재판부는 임의준비금 사용에 관한 영풍 측 주장을 배척하고 자사주 전량 소각 계획 등을 고려해 배임행위로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고려아연은 실제 2025년 6월과 9월, 12월 세 차례에 걸쳐 공개매수로 취득한 자사주 204만 30주를 모두 소각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이사회의 의사결정 과정뿐 아니라 자사주 매입가격의 적정성까지 면밀히 심사했어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재판부가 자사주 매입가격의 적정성보다는 이사회 의사판단이 적법한 절차를 거쳤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고려해 자사주 매입가격이 적정했는지를 더 엄밀하게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지배권 경쟁 과정에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 자체가 지배권 방어인데 이를 단순히 경영판단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사회 의결을 거쳤는지 형식적 정당성만 따지게 되면 웬만한 주주대표 소송은 다 지게 된다”며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힐 여지도 있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양측은 다른 소송에서도 다투고 있다. 지난 4월 대법원은 2025년 정기주총 당시 영풍의 의결권 제한을 둘러싼 가처분 사건에서 영풍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반면 지난 7월에는 2025년 1월 임시주총에서 영풍의 의결권을 제한한 조치가 위법하다며 박기덕 고려아연 대표이사에게 1억 원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이 나왔다.
영풍·MBK는 이번 판결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고려아연이 1조 6000억 원 이상을 차입해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자사주를 매입하면서 재무건전성과 주주가치가 훼손됐는데도 법원이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MBK와 영풍은 ‘적대적 M&A’를 위해 당사의 정상적 경영 활동을 방해하며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물론 이사들의 경영 판단마저 위축시키는 협박성의 ‘묻지마 식’ 소송 남발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