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 들거나 ‘군기’ 잡히거나
박근혜 당선인이 15일 인수위 회의실에서 열린 여성문화분과 국정과제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 당선인은 북한 핵실험과 친박계 보좌관 로비사건 연루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특히 이번 보좌관 로비사건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둔 박근혜 당선인의 최측근 보좌관들이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여권 내부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박 당선인이 엄정하게 처리할 경우 대선 때 고생했던 친박계 인사들의 집단 반발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친박계 일각에서는 “여의도 관행상 골프로비 정도는 묵인할 수 있는데 박 당선인 측이 인사불만 등을 제기하는 친박계에게 공개 경고장을 날리기 위해 ‘공개수사’로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다소 감정적인 해석도 나오고 있다.
‘핵폭탄이 될지, 모형 수류탄에서 그칠지.’ 지난해 지식경제부는 대구시가 출자한 대구 테크노파크(TP)를 감사하다 간부 K 씨가 국책사업비 1억 2000만 원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했다. 직원들의 연구수당과 성과급으로 부풀려 지급한 뒤 돌려받는 수법이었다. 간부는 해임됐고, 원장은 옷을 벗었다. 횡령 자금 규모도 크지 않았고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대구 지역에서도 조금씩 잊혀 가던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구 TP 사건이 ‘보좌관 로비 사건’으로 둔갑하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경찰의 수사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원회와 정치권으로 타깃을 옮긴 분위기다. K 씨가 쓴 돈 일부가 정치권의 로비 자금으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전·현직 국회의원의 전·현직 보좌관 몇 명이 거론되고 있다.
연루 의혹이 제기된 H 씨는 대구에서 4선을 지낸 친박근혜계 박종근 전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2년 전 대구 TP가 접대 골프 명목으로 태국으로 보좌관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나라당보좌진협의회 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선후배 보좌관들로부터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인데 주위에서 “안타깝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태국 골프에 동행한 의혹이 제기된 L 씨는 친박계 한선교 의원의 전직 보좌관이다. 대구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L 씨는 현재 당선인 비서실에서 일정 등을 담당하고 있는 핵심실세다. 한 친박계 인사는 “L 씨는 오래전부터 박 당선인을 도왔던 보좌진 그룹 중에서도 최고 실세다. 음 아무개 보좌관 등과 함께 대선 때 핵심실세로 활동했다”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최측근 실세 중 한 명이어서 인수위가 더욱 시끄럽다고 한다. 박 당선인의 용인술이 자꾸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마당이라 그의 연루는 더욱 박 당선인 측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상 덮을 수만은 없게 됐다.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의 전직 보좌관인 R 씨는 접대 골프를 받은 한 명이지만 대구 TP 측으로부터 현금 수천만 원을 받은 의혹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정치권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당초 K 씨의 횡령금액이 1억 2000만 원으로 알려졌는데 수억 원대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사 대상이 대폭 늘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들렸고 새누리당 보좌진들도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R 씨는 지난해 총선에서 대구에 공천 신청을 했던 예비 후보자였다. 최종 후보자로 거론됐을 정도로 당내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다. 지난해 대선 정국에서는 김무성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의 정무특보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R 씨 스스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박근혜 후보 일정기획팀장을 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R 씨의 면면이 알려지면서 박 당선인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유승민 국회 국방위원장의 보좌관 P 씨는 사건이 알려지면서 곧바로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 위원장도 사과 보도자료를 내고 보좌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데 대해 지역에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유 위원장의 발 빠른 조치가 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몇 년을 함께 한 보좌관도 의혹 때문에 옷을 벗는데 인수위원회에서는 도대체 왜 수습을 하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항변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사실 부적절한 정치자금에 대해선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차떼기당’ 파문을 수습하면서 대중성을 키웠지만 그만큼 힘이 들었다. 특별감찰관제를 도입해 자신은 물론이고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를 항상 감시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돈 문제로 ‘권위’가 추락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보좌관 로비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먼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친박계의 반란이 시작될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최근 박 당선인을 바라보는 친박계 보좌진들의 시각은 약간 삐딱해져 있어 이번 사태가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게 됐다.
지난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파견됐던 현역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국회로 불명예스러운 귀환(?)하면서 입이 삐죽 튀어나온 상태다. 청와대로 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일이 틀어질 수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거기에다 박 당선인이 ‘작은 청와대’를 이야기하면서 기획관과 행정관 자리 수십 개가 사라질 판이다. 청와대 경험을 토대로 출마를 계획했던 인사들 사이에서 낭패감이 터져 나오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 자기 돈을 써가며 일했던 실무진들 사이에서는 요즘 “이런 취급 받으려고 도운 게 아니다”라는 서운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한 정치권 인사는 “솔직히 박 당선인이 모르는 많은 불미스런 일들이 얼마나 많겠냐. 그런데 코너에 물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 수 있는 것이다. 터질지 불발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의도는 폭풍전야 같다”고 귀띔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보좌관들이 그동안 누적된 불만을, 윗선도 연루돼 있다는 식으로 ‘불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 당선인이 이번 사건을 엄정하게 처리해 인사 불만 등을 품고 갈등을 야기하려는 친박계에 공개 경고장을 날릴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대구 TP 사태는 결과가 나오는 대로 박 당선인이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근혜라는 이름으로 호가호위한 인사들에 대해 일종의 ‘경고장’을 날릴 것이란 이야기다.
지난해 총선 당시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공천헌금’에 관한 여러 소문이 나돈 적이 있다. 박근혜계의 최측근 인사들이 공천을 주물렀다는 의혹 보도도 잇따랐다. 총선 이후 곧바로 대선 국면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묻혔지만 최근 박 당선인이 ‘박근혜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당시 일을 들추려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돈에 얽힌 구설이 있다면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죗값을 물어 정권 초기 권력형 비리 엄단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박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정권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반 여권성향의 경찰 일부가 의도적으로 흘려 오버한 것”이라는 색다른 주장도 내놓고 있다. 지난 대선 때 핵심에서 활동했던 한 친박계 인사는 이에 대해 “정권 초기라면 이번 사건 같은 악재는 어떻게 해서든 정무적 대응을 하면서 강력하게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교체기에 이런 사건이 터져버렸다. 박 당선인으로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찰도 검·경 수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려 사건을 증폭시키려 하지 않았는지 의심이 든다. 정권 출범을 앞두고 상당히 악재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북한 핵실험으로 눈길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는 사이 내부에서 보좌관 로비사건이 터져버렸다. “안팎에서 터지는 돌발악재에 박 당선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는 것 아니냐”는 당 일각의 우려도 쏟아져 나온다.하지만 친박계 핵심들은 “아직 정권이 출범하지 않아 정리가 안 됐다”고 항변한다. 새 정권 출범이 1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은 왠지 한가한 변명으로만 들린다. 내각 인선도 정상출범이 이미 늦어버린 상태다. 박근혜 정부의 초반 스타트가 이래저래 불안하기만 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선우완 언론인
이동흡 낙마, 특정업무경비가 뭐길래 영수증 필요 없는 ‘눈먼 돈’ 지난 13일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지명 41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인사청문회 이후 계속된 여론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인데 정치권에서는 ‘특정업무경비’ 유용에 관한 의혹에 가장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인사청문회 당시 이동흡 전 후보자는 대법관 시절 특정업무경비 3억 2000만 원을 개인통장에 넣어 보험료, 카드대금, 경조사비, 자녀유학비용 등으로 쓰고, 일부를 자신의 MMF(초단기금융상품) 계좌로 이체하는 등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참여연대는 이 전 후보자를 검찰에 고발했고 사퇴 이틀 전인 11일부터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요즘 ‘특정업무경비’가 국회에서도 관심사인 모양이다. 특정업무경비는 업무추진비, 직책수행비, 특수활동비와 함께 ‘공무원 4대 경비’로 불리는데, 공무원 사회에서는 ‘눈먼 돈’ 내지 ‘쌈짓돈’으로 통하기도 한다. 국회사무처 한 관계자는 “업무추진비와 특정업무경비에서 자유로운 공무원 사회는 없다”고 단언키도 했다. 특정업무경비는 원래 ‘각 기관의 수사, 감사, 예산, 조사 등 특정업무수행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하는 경비(기획재정부 지침)’로 규정돼 있다. 그러나 관행적으로 각 부처별로 배분하거나 개인에게 월 30만 원 내외에서 수당처럼 지급되고 있다. 증빙 서류나 영수증 대신 내역서만 받고 있어 얼마든지 개인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2013년 특정업무경비 예산규모는 약 6524억 원. 이 중 경찰청이 4434억 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국세청(479억), 법무부(401억), 해양경찰청(336억) 순이다. 국회는 올해 다섯 번째로 많은 178억 원을 배정받았는데 헌법재판소에 배정된 10억 8200만 원의 17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밖에도 국회는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120억 원(2012년 기준)을 사용했고 사용처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특수활동비 역시 매년 수십억 원씩 지원된다. 국회에 배정된 이런 경비 중 일부는 상임위별로 일정액이 배분된 다음, 의원들의 정책토론회나 외교활동 등에 지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의원들 역시 알게 모르게 특정업무경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특정업무경비 등 어떻게 쓸 것인가’ 정책토론회에서 전진한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은 “감시를 해야 할 국회의 특정업무경비가 가장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승수 변호사는 “특정업무경비 문제가 뿌리 뽑히려면 국회부터 변해야 한다. 과거 국회에서 사용한 이런 경비들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소송이 제기됐고 대법원에서 공개 판결까지 내려졌음에도 여전히 판결을 무시하고 정보를 비공개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납세자 소송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강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 정책토론회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은 주최자인 진보정의당 박원석 의원 한 명뿐이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