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62>
사진제공=한국전통음식연구소
집필은 조자호(趙慈鎬) 선생(1912~1976)이 맡았다. 그는 1939년 한국음식의 조리법을 집대성해 <조선요리법>을 펴냈다. 중앙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서울 종로의 신신백화점에서 최초의 한과점인 ‘호원당’을 열었던분이다. 지금도 전통음식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그의 책 내용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조자호 선생이 당시 <동아일보>에 소개한 음식은 22가지를 보자.
만두, 잡채, 족편, 숭어찜, 오곡밥, 물송편, 양선, 두부전골, 수전채, 게묵채,식혜, 배숙, 수정과, 약식, 양전유어, 두텁떡, 잡과편, 쑥꾸리, 생편, 율안, 졸안,녹말편.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드는 음식도 있지만 생소한 음식이 적지 않다. 우리의 음식문화가 76년 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예컨대 요즘 이탈리아식 요리로 자주 소개되는 숭어찜은 평양의 대표 음식이었다. 평양 사람들은 관혼상제 때 대동강 연안에서 잡은 숭어를 요리해 상에 올렸다. 숭어찜이 없으면 상을 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만두이지만 당시에는 꿩과 쇠고기를 재료로 썼다. 간식으로 먹는 녹말편은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다. 녹말가루에 오미자 물과 꿀을 타서 뭉근한 불로 진하게 달여 굳힌 음식이다.
겨울 음료로 눈길을 끄는게 배숙이다. 후식으로 먹는 겨울철 화채다. 수정과의 사촌쯤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생강을 끓여서 곶감을 넣은 수정과와 달리 배숙은 배를 주재료로 쓴다. 만드는 법을 조금 자세히 보자.
생강은 껍질을 벗기고 씻어 얇게 저미고, 여기에 물을 부어 생강차를 끓인다. 배는 껍질을 벗긴 다음 4~6쪽으로 갈라 속을 뺀다. 까만 통후추를 배의 등쪽에 3~5개씩 박아 끓여 둔 생강차에 넣는다. 설탕도 함께 넣어 배가 투명할 때까지 끓인다. 까만 통후추는 구미를 돋우게 한다.
배숙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곶감 대신 배를 넣었다 하여 배수정과, 익힌 배라 하여 이숙(梨熟), 작은 배를 통째로 후추를 박아서 끓였다고 해서 향설고(香雪膏)라고도 한다.
배숙은 목감기 예방에 아주 좋다. 친정 엄마가 끓여준 배숙을 먹고 감기에 나았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쉽게 듣는다.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여러 방도를 써보았으나 낫지 않았고 배숙을 먹였더니 떨어졌다는 얘기도 자주 들린다. 가래 기침 해소와 해열에 좋다. 소화제로 쓰이며 술 해독에도 뛰어나다.
배숙의 유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의 <목은고>에 나오는 ‘증리(蒸梨)‘란 시를 보자.
배를 시루에다 푹 삶은 뒤에/ 서당에서 마음껏 맛보노라니/ 약간 신맛이 입 안에서 시큼시큼/ 남은 열기가 뱃속에서 뜨끈뜨끈/ 배고픈 느낌도 어느새 사라지고/ 졸음 귀신도 줄행랑치누나./ 생각나네, 깊어가는 연경의 어느 날 밤/ 이 배 먹고 싶다고 문간에서 소리치던 일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배숙의 조리법은 아니지만 배를 삶아서 먹었던 풍습이 고려 때부터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량음료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차를 마시는 관습, 즉 음다풍속(飮茶風俗)이 널리 유행했기 때문이다. 물맛이 좋았기 때문에 청량음료가 필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가 퇴조하고 음다풍속 역시 조금씩 사라져갔고, 배숙은 이때부터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에서는 보기 힘들었고 궁중음식으로만 명맥을 이어왔다.
배숙의 조리법은 조선 후기인 1829년 왕·왕비·왕대비 등의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에 처음 등장한다. 19세기 말 한글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장미화채, 복숭아화채, 두견화채 등과 함께 배숙의 조리법이 등장한다. 1827년부터 1892년까지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에 8회나 올랐다는 기록도 나온다.
배숙은 최근 들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현대인의 입맛을 끌어당기고 있다. 배숙셔벗(sherbet)이 대표적이다. 배숙을 만든 뒤 얼려서 셔벗으로 먹는다. 아기 초기 이유식으로도 활용한다. 지난 1월 24일 스위스 다보스포럼 ‘한국의 밤(Korea Night 2013)’ 만찬 행사에서 에드워드 권이 한식을 새롭게 재해석한 메뉴를 선보였는데, 이 자리에도 배숙이 등장했다.
서구의 청량음료에 오랫동안 자리를 내어준 우리의 전통음료도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해서 우리 국민과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