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선 밑밥 깔고 뒤에선 물밑 작업
▲ 경영권 승계를 앞둔 이재용 전무(오른쪽)의 안위를 위해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 ||
에버랜드 사건의 구조본 개입 여부는 8년을 끌어온 에버랜드 사건 재판의 최대 화두였다. 그동안 구조본 개입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채 이건희 회장 소환 논의는 공염불이 됐고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이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는 선에서 항소심이 마무리됐다. 이번 특검 수사과정에서 구조본 개입 정황이 포착된 것은 구조본이 이 회장의 지시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회장에 대한 기소 사유로 발전할 수 있다는 관측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특검에 불려간 삼성 측 인사들이 특검에 ‘도움’이 될 만한 진술을 하나둘 털어놓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학수 부회장 입에서 구조본의 개입 정황이 포착될 만한 진술이 나왔다는 점은 곧 삼성이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마지노선을 특검에 제시한 것이라 풀이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이번 수사 대응을 총지휘하는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는 까닭에서다.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한 구조본의 조직적 개입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전략기획실 핵심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에버랜드 사건의 최대 수혜자인 이재용 전무에게까지 특검의 화살이 닿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대두된다. 이 전무는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 전무는 ‘e삼성의 경영부실로 인해 계열사들이 부담을 떠안았다’는 이른바 ‘e삼성사건’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아 ‘면죄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학수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 과정과 관련한 특검 조사에서 구조본 개입 여부에 대해 “이건희 회장은 몰랐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회장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구조본이 이 회장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임을 감안하면 이 회장이 구조본 공모 사실을 전혀 모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현대차 비자금 사건 당시 정몽구 회장이 아들인 정의선 사장을 대신해 구속수감을 자청한 사례를 거론하며 경영권 승계를 앞둔 이 전무의 안위를 지키는 데 이 회장과 삼성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한 대형병원 안팎에 이 회장 입원준비 관련 소문이 파다했다는 점(<일요신문> 825호 보도) 또한 이 회장 측이 기소에 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는 지적이다.
이학수 부회장 등에 대한 기소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처벌의 무게가 어느 정도에 이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삼성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 고 박 아무개 전무의 책임 논란 때문이다. 특검 수사 전 검찰 특별수사·감찰본부 조사 당시 김석 삼성증권 부사장이 “하급자인 박 전무의 지시를 받아 에버랜드 사건 재판에서 거짓 진술을 했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 화제가 된 바 있다. 고인이 돼 소환조차 할 수 없는 박 전무 책임론의 수위가 얼마나 높아지느냐에 따라 현직 삼성 고위인사들에 대한 처벌수위도 조정될 전망이다.
일각에선 정치적 변수와 맞물려 삼성 인사들에 대해 수사당국이 체면치레하는 정도의 처벌이 가해질 것이라 보기도 한다. 삼성 인사들이 에버랜드 사건 구조본 개입 등 특검이 필요로 하는 진술들을 조금씩 내놓는 배경을 두고 친기업 성향을 내세운 현 정부와의 물밑교감설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자칫 현 정부 세력의 안위를 위협할 것 같았던 특검의 칼날이 다른 정파들을 향하기 시작한 까닭에서다.
처음에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법무팀장)가 이명박 정부 관료들에 대한 삼성의 로비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번 수사가 자칫 현 정부와 삼성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다는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 변호사 폭로 이후 청와대와 해당 관료들이 ‘근거 없는 진술’이라며 강경반응을 보인 데 이어 특검 안팎에서도 증거 부족으로 로비 의혹이 무혐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특검 수사 개시 전 김 변호사와 사제단이 공개한 이른바 ‘떡값 검사’들 역시 최근 검찰 인사에서 영전하거나 자리 보존을 했으며 이들에 대한 특검팀의 직접 조사는 이뤄지지도 않았다.
삼성 임원들의 차명계좌에서 거액이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지난 2002년 대선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됐는지에 대한 특검 수사도 진행 중이다.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범위가 커질수록 노무현 정권 인사들이 중심에 있는 통합민주당이나 한나라당과 결별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측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검의 ‘칼날’은 이번 총선의 또 다른 중대 변수로 거론되고 있다.
이재용 전무가 무탈하고 삼성 인사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확정될 경우 특검과 삼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쏟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비자금 출처로 거론된 몇몇 계열사들의 분식회계 건이 특검 수사 막판에 도마 위에 오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분식회계를 통해 비자금이 조성됐는지 여부에 대해선 삼성 인사들이 하나같이 부인해 정황 포착이 어렵다 해도 장부 조사를 통해 분식회계 자체를 밝히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란 지적이다. 특검 입장에선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여론무마용으로, 삼성 측에선 총수 일가가 다치지 않는 ‘대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한편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수사 종료 시점이 다가오면서 삼성이 여론 수습 방안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에도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삼성 측이 특검팀에 제출한 차명계좌 700여 개에 담긴 금액은 총 2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이 주장하는 대로 횡령액이 아닌 선대 회장의 유산으로 조성된 금액이라면 횡령이나 배임 혐의로 처벌이 불가능하며 공소시효가 지나 조세포탈 적용도 어렵다. 그러나 횡령액이 아닌 상속재산이라 해도 이는 그동안 차명재산이 없다고 주장해온 것이 거짓이었다는 점과 은닉재산 규모가 2조 원에 이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렇다 보니 삼성이 1조 원 정도를 풀어낼 가능성이 거론된다. 그동안 일부 재벌가의 적법한 재산 상속 관행 사례에 비춰볼 때 2조 원에 이르는 재산을 상속하려면 적어도 1조 원 정도의 상속세가 요구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센 비난 여론에 계속 시달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일정 금액을 사회에 내놓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삼성그룹 내 지배구조 개편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삼성의 고위급 인사들 중 출국금지 조치를 받지 않은 윤종용 부회장이 고군분투하다시피 해외를 돌아다니며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영권 승계과정에 대한 개입 여부와 관련해 이건희 회장,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에 대한 특검의 처벌수위에 따라 이들의 경영공백이 발생할 경우 그룹은 이재용 전무와 윤종용 부회장 중심의 임시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언이다.
일각에선 이 회장이 불기소된다 하더라도 도의상 책임을 지고 명예회장이나 이사회 의장 같은 형태로 물러나는 방안까지 거론된다. 당장 이재용 전무의 ‘대관식’이 이뤄지긴 어렵더라도 이 전무 체제로 전환되기 위한 한시적 비상경영 체제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