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데이트폭력 결말… 3일에 1명 죽어 나간다
사진은 가족폭력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 <마누라 죽이기>가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남편에 의해, 혹은 애인 등에 의해 벌어지는 치정살인과 관련된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2년 사흘에 한 명꼴로 여성들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경찰과 사법기관의 대응은 아직도 미흡하기만 하다. 가정폭력과 애인에 대한 집착이 살인까지 부르는 험악한 세태를 살펴봤다.
지난해 12월 20일 제주시 애월읍의 한 빌라에서 A 씨와 그의 부인, 아들, 딸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안방에는 부인과 아들이, 건넌방에는 A 씨와 딸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A 씨의 목에는 노끈이 3차례 감겨있었다. 제주지방경찰청 관계자는 “A 씨가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3일 감 아무개 씨는 별거하고 있던 아내를 자신의 차량에서 흉기로 살해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그런데 방법이 엽기적이었다. 서울 강남경찰서로 자수를 하러 온 감 씨의 차 조수석에는 가슴에 흉기가 그대로 꽂혀있는 아내의 시신이 앉혀져 있었던 것이다. 감 씨는 조사에서 “별거 중이던 아내가 외도했고, 이에 대화로 관계를 풀어보려 차로 불러냈다”며 “말다툼 끝에 아내가 이혼하자고 말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2년 1월부터 12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자체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20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49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최소 3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으며,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이틀에 한 명의 여성이 살해 위험에 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여성의전화’ 한 관계자는 “이 수치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을 집계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여성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살해 위험은 비단 해당 여성들뿐 아니라 자녀들이나 부모, 지인, 이웃 등도 노출돼 있다. 지난해 피해여성의 주변인이 살해되거나 미수에 그친 수는 35명에 달했다. 심지어 가해 남성이 사건을 저지르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됐다.
이렇게 가정 폭력으로 인한 살인 및 미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경찰의 대처는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경기지방경찰청 112 종합상황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원시 지동에 사는 B 씨는 “아침부터 구타를 당하고 있으니 빨리 와 달라”고 구조 요청을 했다. B 씨는 C 씨와 9개월 전부터 동거를 하다 최근 성격 차이 등을 이유로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폭행을 당했던 것.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홍일. 연합뉴스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경찰의 미온적 태도에 대한 불만사례’는 모두 74건. 피해여성들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해자를 고소하더라도 가해 남성의 말만 듣고 경찰이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그 후 돌아오는 더 큰 폭력이 무서워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사정은 애인에 의한 데이트 폭력에서도 마찬가지다. 3개월째 신경정신과를 다니고 있는 D 씨.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 건 전 남자친구 E 씨에게 당한 끔찍한 기억 때문이다. D 씨는 “E 씨가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처음엔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는 등 증상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때부터 악몽은 시작됐다”고 밝혔다.
E 씨는 D 씨의 자취방에 매일같이 찾아와 물건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고, 강압적으로 성관계까지 가졌다. 그는 “5년 동안 나를 갖고 놀았냐. 다른 남자 못 만나도록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는 등 폭언을 내뱉고 폭력도 휘둘렀다. 경찰에 신고하려고도 했지만 E 씨가 “감옥에 다녀와서 가족들도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D 씨는 E 씨를 피해 이사했지만 언제 E 씨와 마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해 7월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홍일도 “헤어지자는 말에 격분해서 그만 살인을 저질렀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데이트폭력으로 인해 지난해 살해당한 여성이 37명에 달하지만 경찰의 대응이 미약하고 처벌 가능성도 희박해 여성들은 신고를 꺼리고 있다. 한 피해 여성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더라도 가해 남성이 사귀는 사이라고 하면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리거나, 피해자가 저항하다가 낸 상처를 가지고 쌍방폭행으로 사건을 접수해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경찰이 ‘반 동거했으면서 무슨 감금이냐’, ‘모텔에 평소에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납치라 할 수 있나’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으로 사망한 여성들의 연령을 보면 40대가 33.1%로 가장 높다. 중장년층이라 할 수 있는 40~50대로 확대해보면 전체 피해 여성의 절반인 49%를 차지한다. ‘한국여성의전화’ 한 관계자는 “이 비율은 지속적인 가정폭력이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며 “2012년 상담통계를 보면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결혼기간은 10년에서 20년 이하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여성들이 인식을 바꿔 가정폭력범죄는 초기에 적절히 대응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또한 경찰과 사법기관의 강력한 처리와 명확한 처벌을 위한 법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여성 가해자도 많다 내연남과 공모…남편 시신과 동거 지난달 20일 충북 청주의 한 주택 다락방에서 박 아무개 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박 씨의 시신은 손이 묶인 채 이불과 비닐 등으로 겹겹이 싸여 가로, 세로 70㎝ 정도의 이삿짐 운반용 종이상자에 담겨있었다. 살해된 지 4년이 지났지만 공기와 접촉하지 않아 부패되지 않은 미라 형태로 발견된 박 씨의 목과 가슴 부위에는 흉기에 찔린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었다. 박 씨를 살해한 범인은 박 씨의 아내인 김 아무개 씨와 그의 내연남 정 아무개 씨. 5년 전인 지난 2008년 인터넷 채팅을 통해 알게 된 후 내연관계를 갖던 두 사람은 소아마비장애가 있는 박 씨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2009년 3월 서울 제기동의 주택에서 흉기로 박 씨의 가슴 부위를 찔러 살해했다. 이후 청주로 이사한 그들은 시신을 유기한 종이상자를 다락방에 방치한 뒤 다른 물건 등으로 가려 놓고 4년 가까이 남편의 시신과 함께 동거했다. 김 씨는 박 씨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에게 “아빠가 집을 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속인 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정 씨를 의붓아버지 삼도록 했다. 심지어 이들은 장애인인 박 씨에게 지급되는 17만 원 정도의 장애 연금도 매달 받아 챙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지난해 7월에는 가정주부 A 씨가 바람을 피운 내연남 B 씨를 흉기로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A 씨는 “8년간 사귀어온 B 씨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화가나 술기운에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진술했다. 또한 같은 달 C 씨는 서울 역촌동 자택에서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 D 씨가 얼굴에 침을 뱉는 등 폭언을 내뱉은 데 격분해 흉기로 D 씨를 여러 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로 C 씨를 구속했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 부부는 지난 5년 사이 3차례나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부부싸움이 잦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