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려도 ‘거인의 리모컨’은 계속된다
▲ 지난 4월 22일 경영 퇴진을 전격 선언한 이건희 회장과 사장단. 이 회장은 물론 전략기획실도 해체 수순을 밟게 됐지만 실제 이 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뗄 거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 ||
그러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이것이 이 회장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이라 보기엔 아직 이르다는 평도 제기돼 관심을 끈다. 아들인 이재용 전무가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도록 이 회장의 ‘섭정’이 본격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22일 쇄신안 발표 직후 이학수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퇴진하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되면 각 사별 전문경영인에 의해 독자적인 경영 체제가 이뤄질 것”이라 밝혔다. 이 회장과 함께 이 부회장, 그리고 계열사 간 업무 협의와 조정 역할을 맡아온 전략기획실도 사라지게 돼 한동안 그룹을 이끌 리더십 부재 위기에 당면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삼성은 쇄신안 발표를 통해 향후 대외적으로 삼성그룹을 대표할 담당자로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나서게 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수빈 회장이 그룹 경영 전반을 통솔해온 이건희 회장이나 이학수 부회장의 역할을 그대로 맡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한시적 체제를 대표해줄 ‘얼굴마담 최고참 현역 임원’이란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 인사들은 이건희 회장의 ‘조언’에 따라 계열사들이 운영되는 체제를 예상하고 있다. 어차피 지금껏 이 회장은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집무실보다는 이태원동에 있는 개인 집무실이자 영빈관 용도인 승지원에서 업무를 처리해왔다. 삼성 특검팀이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압수수색에 들어간 곳도 바로 승지원과 이태원동 자택이었을 만큼 삼성본관 집무실보다 업무적으로 더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다.
이 회장은 주로 경영전반을 챙기는 이학수 부회장의 보고를 정기적으로 받은 뒤 업무지시를 내리는 편이었지, 매일같이 계열사 사장단과 만나 경영현안을 챙기는 것은 아니었다. 회장직을 벗어던지고 집에 있더라도 여전히 지배력이 확고한 이 회장이 종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경영을 챙기는 데 별다른 장애물은 없는 셈이다.
이 회장의 향후 경영행보를 정몽준 의원과 비교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주주지만 그룹과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다. 현대중공업 측에 따르면 사옥엔 정 의원 개인사무실조차 없지만 정 의원은 불편함 없이 그룹 내 주요인사와 경영현안 등을 챙기고 있다고 한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경영권 다툼으로 비화된 현대상선 지분 인수나 현대건설 인수 관련 신경전이 정 의원 아닌 전문경영인에 의해 이뤄진다고 보는 재계인사는 아무도 없다. 회장 직함 없이 대주주로서 얼마든지 그룹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전무.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두산 총수 일가 사례를 들어 이 회장이 당분간 승지원에서 ‘섭정’을 하다가 경영일선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하는 시선도 있다. ‘형제의 난’으로 회사 돈 횡령혐의가 드러나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두산 총수형제들이 전원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 복귀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년이었다(완전 퇴출된 박용오 전 회장은 예외다). 의사 출신 두산가 4남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마저 그룹 경영에 참여해 형제의 난 이전보다 오히려 총수 일가 참여 폭이 넓어졌다.
이 회장의 복귀 가능성에 대해 삼성 인사들은 하나같이 “본인(이 회장) 말에 책임지는 분인 만큼 복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허나 이 회장이나 이학수 부회장이 퇴진 이후 구체적 행보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삼성 측은 이에 대한 여론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쇄신안 발표 이후 그룹 내 핵심 임원들에 대해선 ‘당분간 저녁 약속을 잡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외부상황 변화에 따라 탄력적인 세부 방안을 풀어놓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이 전략기획실 해체작업과 이 회장 차명재산의 일부 사회 기부 등의 일정을 6월로 잡아놓은 것 역시 삼성 쇄신작업에 대한 여론 추이와 특검 기소자들에 대한 재판 상황을 보면서 구체적 방안을 내놓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의 투자·고용 확대를 간절히 바라는 정부·여당의 행보 역시 이 회장 운신의 폭을 넓혀줄 것으로 예상된다.
경영일선에 복귀하든 안 하든, 섭정을 하든 안하든 이 회장에겐 4월 22일 기자회견장에서 밝힌 것처럼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불안한 경영권 승계작업에 ‘화룡점정’을 해줄 사람은 이 회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학수 부회장도 “사회적으로 인정 못 받는 이재용 전무의 승계는 불행한 일”이라 밝혀 이 회장이 이 전무 승계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고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수빈 회장의 대외 대표 업무가 한시적 체제인 만큼 이 전무가 하루빨리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이 회장이 전력을 쏟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 전무가 해외 업무 등을 통해 백의종군하며 경영자적 역량을 키워나갈 것이라지만 여론의 무게는 지분 확보의 정당성에 실릴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신세계 한화 등이 그랬던 것처럼 이 회장 역시 합당한 상속세를 물어가며 이 전무에게 일정 지분을 상속해 이 전무 승계의 정당성을 호소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그룹 지배권 유지에 필요한 에버랜드 지분의 경우 이미 이 전무가 25.10%를,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가 각각 8.37%를 확보한 상태다. 이 회장 명의 3.72% 정도는 없어도 지배권 유지에 큰 부담은 없다. 이 회장이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에버랜드 지분 일부를 이 전무에게 증여하고 나머지를 상속세로 납부해 상징성을 확보할 수도 있는 셈이다.
몇몇 재계 인사들은 “이 회장이 회장직을 놓더라도 회사 경영이나 이 전무로의 승계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승지원은 여전히 현안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