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져죽을까 겁이 나면서도 나는 어느덧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어린아이가 되어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순전히 바다와 놀고 파도와 놀았다. 파도는 알까? 그가 한순간 사라지는 파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바다라는 사실을. 왜 거기서 소금인형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안치환의 ‘소금인형’을 불렀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어 녹아버렸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류시화는 저 시, ‘소금인형’을 남인도 바닷가에서 만들었을 거라고. 왜 바다에서 소금인형을 떠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완전히 녹아서 바다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바다의 생각이었다. 그만큼 바다는 위대하다. 그 신비의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그 아름다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거기 남인도 벵골만 바닷가에서 바다를 신에 비유한 신화들이 괜한 것이 아님을 비로소 이해했다. 이렇게 우리를 압도하는 존재가 신이 아니면 무엇이 신이겠는가.
벵골만 해변에는 작은 사원이 하나 있다. 파이브 라타스(Five Rathas)라는 사원이다. 사랑의 신이며 전쟁의 신인 크리슈나를 모신 사원인데 천년을 모래 속에 파묻혀 지내다 19세기에 발견된 사원이다. 크리슈나는 왕자의 마부로 왔다. 왕권을 놓고 사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니 왕자 아르주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싫어 아예 왕권을 포기하려한다. 그 때 전쟁의 신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마부로 나타나 아르주나를 격려한다. 놓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앓지 말고 싸우라고.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오직 행동하라고.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늘 전쟁터 아닌가. 전쟁 같은 사랑, 전쟁 같은 일, 전쟁 같은 관계를 만드는 우리는 슬퍼할 기력도 없이 황폐해 있다. 늘 정신이 없고 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폭발한다. 지금 내 삶에 크리슈나가 나타난다면 무엇이라고 충고할까?
어느덧 태양은 완전히 떠올라 그 신비를 감추었다.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소금인형인 줄 알고 바다도 잊고 태양도 잊고 파도를 타며 놀던 나는 다시 내가 되어 멋쩍게 바다위로 올라왔다. 아, 소금인형, 하면서.
그리고 보니 우리 속엔 소금인형이 되었어도 녹지 못하고 돌올히 남아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를 태어나게 한 것이고 죽게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를 기쁘게 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이며, 때때로 우리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지탱시켜주기도 했던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녹아야, 완전히 녹아야 이 세상을 소풍 온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바람이 불 때마다 기원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아픔이 되는 그것, 나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당신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