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5부작으로 <공부하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것을 만든 정현모 PD가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창의적으로 잘 노는 것이 공부일 수 있는 아이가 ‘공부’해야 한다고 책상에 앉는 것을 본 후에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공부에 대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의식에서 다른 사회는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었단다.
아이는 책상에 앉아서 소위 ‘공부’라고 하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 부모와 함께 혹은 친구와 함께 요리하고 운동하고 대화하며 놀면서 더 중요한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위해 그 모든 과정을 과감히 빼먹고 일상을 공부로만 채운다. 공부만 하면 되는데, 공부도 못하느냐고 성화하는 엄마나, 공부만 하라고 하니 공부를 못한다고 투덜대는 아이는 찰떡궁합이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써가며 공부시키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청소년들은 지친다. 외워야 할 것, 풀어야 할 것도 너무도 많다. 많이 배울수록 공부가 재미있지 않고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현상은 너무나 당연해서, 재미 있으면 공부냐는 농담 아닌 농담까지 진지하게 떠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공부하는 인간>은 토론의 방법으로 공부하는 서구 공부법을 많이 소개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이었다. 교실에서 선생님은 대답하는 학생들에게 “마따호세프”를 연발했다. 그것은 바로 “너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수천 년 내려온 그들의 삶의 경전 <탈무드>를 가르칠 때, 개별적 사례에 대해 너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어주는 선생은 학생을 통해 모범답안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답을 하고 있는 학생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대학 다닐 때 내 스승 정대현 선생이 그랬다. 그는 꼭 ‘너’의 생각을 물었다. 나만의 생각이 없이 노트 정리를 잘하는 것은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스승에게서 배웠다. ‘나’의 생각을 정리해 내놓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었고, 동시에 내가 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를 가면 코끼리를 탈 수 있다. 코끼리가 초식동물이긴 해도 야생에서는 쉽게 자기 등을 내줄 만큼 순한 동물은 아니란다. 그런 코끼리를 어떻게 인간이 탈 수 있을까? 아기 코끼리였을 때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훈련이 매우 폭력적이라고 한다. 굶겨서 기를 죽이고, 때려서 기를 또 죽이는 행동을 반복하면 코끼리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채 어른이 되어 돈벌이에 나선다. 인간에 관점에서는 길들여진 코끼리지만, 코끼리에 관점에서는 자기를 모르는 코끼리, 자기 안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모르는 코끼리가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코끼리를 탈 수 없었다. 우리의 교육 목표가 돈 잘 버는 코끼리라면? 비참하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