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그녀에게 덜미 ‘박근혜 불가론’ 고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주고받은 ‘강도’ 설전은 세종시 수정안 문제가 권력 싸움으로 비화된 단면을 보여준다. 사진제공=청와대
세종시 논란이 이명박의 조기 레임덕을 불러왔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이 있을까. 단적으로 당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 12개 단체는 성명서를 내고 전국 과학기술인들의 염원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행정도시 축소 변질용’으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며 폭발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에 대한 추진 논의에서 정치적 고려나 이해관계는 배제하라!” “정치권은 과학벨트 사업을 당리당략에 이용하지 마라!” 등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녹아 있었다. 과학기술인부터 이명박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시 논란은 이렇듯 국론 분열과 지역 갈등, 여야 갈등, 집권 여당 내 계파 갈등 등 모든 분란을 품고 있었다. 정책적, 정치적 이슈가 세종시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국민적 피로도’도 심각했던, 논란의 작품이었다.
새누리당 내부에는 “이러다 곧 쪼개진다”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정몽준 당 대표는 이명박의 세종시 수정안을 받아들이면서 박근혜 전 대표와 각을 세웠는데, 그 유명한 ‘미생지신(尾生之信)’ 일화를 남기고 만다.
“미생이라는 젊은 사람이 애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내리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결국 ‘익사’했다.”
즉, 세종시 수정안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박 전 대표가 곧 ‘익사’하게 될 것 운운한 것이다. 홍준표 의원도 “세종시 논란은 박근혜 전 대표의 ‘신의성실원칙’과 이명박 대통령의 ‘사정변경원칙’이 부딪친 것이고, 그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토론을 통해 정해야 한다. 토론이 안 되면 분당하는 것이 맞다”며 박 전 대표를 겨눈다.
분명한 것은 세종시 논란에서 이명박은 사라지고 박근혜만 보였다는 데 있다. 박 전 대표는 정 대표의 발언에 “이해가 안 된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정 대표를 향해 ‘손가락질이나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2010년 1월 11일, 정부가 세종시를 수정해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동시에 박 전 대표는 대권행보의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1990년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영삼이 내각제 합의각서 공개를 따지며 당무를 거부, 경남 마산으로 내려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압박한 뒤, 차기 대권을 보장받았던 것이나, 이회창이 1993년 국무총리로 임명되고 나서 127일 만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표를 던지고 ‘대쪽’ 이미지를 얻어 단숨에 대권 주자로 도약한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은 박근혜를 자극했고, 박 전 대표는 이명박을 겨냥해 정면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이명박이 세종시 출구 전략으로 ‘개헌 카드’를 꺼내든 것도 정치적 경험이 없는 데서 오는 아마추어적 발상과 같았다.
그해 2월 25일 이명박은 취임 2주년을 맞이해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 간담회를 열고 “선거법 개혁과 행정구역 개편, 제한적이지만 헌법에 손을 대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은 “올해 말까지 개헌해야 한다”며 말을 받았고,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내각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펼친다. 당시 친이계가 자꾸 차기 대통령의 힘을 빼는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이야기를 하면서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깝게 있는 박근혜를 불필요하게 자극한 것이 됐다. 주호영 특임장관과 박형준 정무수석이 꾸준히 박근혜와 접촉하려 했지만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세종시 수정안이 재석 275인 중 찬성 105인, 반대 164인, 기권 6인으로 부결됐다. 일요신문 DB
평정심이 무너진 청와대에서 이동관 홍보수석은 당시 정치권에서 통용되던 ‘박근혜 전 대표’라는 호칭을 버리고 ‘박근혜 의원’과 ‘박 의원’을 다섯 번이나 거론하면서 “잘못을 했으면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니냐. 적절한 해명과 그에 따른 공식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공세를 편다. 친박계는 이동관을 해임하라고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들은 척 만 척했다. 그 와중에 정 총리는 “집안사람이 강도로 돌변한다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가정”이라고 반박, 박근혜를 ‘상식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명박으로선 세종시 수정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자 노림수였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이었던 2005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골자로 한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이 통과될 때, 이명박은 “수도가 분할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로 수도분할반대운동의 선봉에 선 바 있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촛불 정국에서 벗어나 녹색 성장을 외친 이명박의 지지율이 상승세였고, 야당인 민주당은 거대 야당 구실을 전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으며, 경기는 회복세였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으로선 집권 2년차에 4대강과 함께 세종시 수정안을 투트랙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는 ‘침묵하던’ 박근혜의 입을 열게 했고,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봉인을 이명박 스스로 해제해준 꼴이 된 것이다.
2010년 6월 22일,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국토해양위에서 부결 처리되면서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주요 정치인들이 세종시를 두고 정치생명을 건 힘겨루기를 해왔기 때문에 정치적 파장이 만만찮았고, 가장 큰 피해자로 이명박이 지목됐다. 국정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2009년 11월 27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저 하나가 좀 불편하고, 욕먹고,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이것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역사적 소명’이라 밝혔던 이명박으로선 불편하고 욕먹고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면서도 세종시 수정을 해내지 못하게 됐다.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변경해 삼성과 한화, 롯데와 웅진 등 대기업 유치까지 이끌어냈지만, 이명박의 대여 리더십은 그 순간, 끝장이 났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명박과 노무현이 아주 닮은꼴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하반기인 2005년,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하면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부를 들쑤셔 놓아 국정 파행이 거듭된 것처럼, 이명박의 세종시도 같은 꼴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권에선 집권 하반기로 갈수록 ‘분열적 이슈’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그해 6월 29일 결국 정치권의 많은 반대에도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본회의로까지 간다. 거기에서 박 전 대표는 직접 본회의 단상에 올라 반대토론에 나선다. 2005년 4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 이후 5년여 만이었다.
“오늘은 지난 열 달 동안 큰 혼란과 갈등을 가져온 세종시 논란이 최종 결정되는 순간이다. 우리 정치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진다면 끝없는 뒤집기와 분열이 반복될 것이다.”
박 전 대표의 말에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다. 언론은 일제히 ‘박근혜의 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명박이 언론의 주목도에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박근혜로서도 잃은 것이 많았다. 당내 차기 대선주자로 우뚝 섰지만 당내 계파 갈등을 심화시킨 주역이 됐고, 충청권의 지지를 얻었으나 당시 이명박 정권과 대립하게 됐으며,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지만 고집스러운 이미지도 연출시킨 꼴이 됐다.
그러면서 이명박을 둘러싼 친이계는 체제 결속을 강화하면서 세대교체론으로 박근혜를 깎아내리는 전략을 꾀하기 시작한다. 친이계 내부에서 ‘박근혜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장 그 다음 달 벌어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4명의 친박계 주자 중 서병수만이 턱걸이로 최고위원에 당선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세종시 일지 ▶2002년 9월: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가 ‘신행정수도 건설’ 공약 발표 ▶2003년 12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국회 통과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 ▶2005년 1월: 정부 ‘16부4처3청’을 이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 국회 제출 ▶2005년 3월: 여야 ‘16부4처3청’을 ‘12부4처2청’으로 줄여 이전하는 안에 합의 ▶2006년 1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개청 ▶2007년 7월: 세종시 기공식 ▶2009년 9월: 정운찬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세종시 수정” 방침 표명 ▶2009년 11월: 이명박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수정안 당위성 역설, 세종시 민관합동위 발족 ▶2010년 1월: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변경하는 수정안 확정 ▶2010년 3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제출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상임위에서 부결, 본회의 부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