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 얻어 빙과업계 ‘왕’ 노리나
▲ 이건영 빙그레 대표이사(왼쪽)와 윤영달 크라운제과 회장. 아래는 빙그레 ‘투게더’와 크라운이 인수한 해태 제품 ‘브라보콘’. | ||
빙그레와 크라운의 ‘악연’은 지난 200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한 윤영달 크라운 회장은 “빙과업체도 인수해 업계를 양강 구도로 재편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당시 빙과업계는 롯데제과가 1위, 빙그레가 2위, 해태제과가 3위였다. 따라서 윤 회장의 말은 크라운이 빙그레 인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해 빙그레는 당시 “해태제과 인수로 자금 여력도 없는 회사가 우리를 인수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즉각 응수했다. 결국 없던 일이 됐지만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재계 인사들에 따르면 빙그레는 빙과 부문에서만큼은 한 수 아래로 접어뒀던 크라운의 도발(?)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전언이다. 특히 윤 회장 발언은 빙그레가 해태제과 빙과 부문 인수에 나섰다가 무산된 후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빙그레를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4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번엔 빙그레가 ‘창’을 들었다. 지난 10월 30일 빙그레는 ‘크라운이 5년 만기로 2004년에 발행한 21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전량 매입한다’고 밝혔다. 주식으로 환산하면 37만 8126주다. 이는 크라운 지분 21.29%에 해당한다.
현재 크라운의 지분구조를 살펴보면 윤영달 회장이 23.81%로 최대주주고 외국계인 라자드에셋매니지먼트(라자드)가 15.62%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따라서 빙그레가 사들인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꿀 경우 당장 2대 주주에 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윤 회장이 차지하고 있는 최대주주 자리도 넘볼 수 있게 된다. 빙그레의 전환사채 매입을 재계 일각에서 적대적 M&A의 신호탄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크라운 측은 “빙그레가 지분을 확보한다고 해도 경영권에는 아무런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윤 회장 개인 지분은 23.81%지만 윤 회장 일가가 주요주주로 있는 두라푸드가 13.10%를 가지고 있기 때문. 하지만 증권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빙그레가 전환사채권을 행사할 경우 주식 수가 늘어 윤 회장과 두라푸드의 합친 지분은 36.91%에서 34%가량으로 줄어든다. 윤 회장도 안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경우 라자드의 선택이 빙그레와 크라운의 운명을 갈라놓을 가능성이 크다. 15.62%를 가지고 있는 라자드가 빙그레와 손을 잡을 경우 빙그레는 우호지분을 합쳐 총 36%를 확보, 윤 회장과 두라푸드를 제치고 최대주주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앞으로 빙그레와 크라운이 라자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물밑경쟁을 펼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라자드는 크라운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투자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주주들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가게 돼 있다. 라자드가 크라운 편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빙그레가 등장하기 전 얘기다. 앞으로 피 튀는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빙그레는 이러한 M&A 시나리오에 대해 “너무 앞서갔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에 대해 크라운은 “빙그레가 공식적으로 투자가 목적이라고 밝힌 이상, 그 말을 믿어보겠다”고 말하면서도 “경영권과 관련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증권업계의 한 고위인사는 “크라운이 이미 상황에 따른 다양한 대비책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안다. 적대적 M&A도 시나리오 중 하나다. 앞으로 지분 추가 확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재계에서도 ‘투자일 뿐’이라는 빙그레의 말을 의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단지 투자가 목적이었다면 동종업계의 관례를 깨고 통보 없이 기습적으로 전환사채를 사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란 게 근거다. 크라운 관계자는 “사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전환사채를 매입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빙그레 관계자는 “위에서 결정한 일이라 구체적인 내막은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크라운에 대한 M&A까지는 아니더라도 빙그레가 해태제과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재 빙과업계는 롯데가 점유율 38.3%로 1위를 달리고 있고 그 뒤를 빙그레(26.7%)와 해태제과(21%)가 따르고 있다. 지난 2005년 빙그레가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했더라면 그 순위는 달라졌을 터. 이 때문에 빙그레가 해태제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여기에 제과업계 진출도 ‘덤’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수년 전부터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고 있는 빙그레로서는 해태제과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라운은 해태제과 지분 54%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빙그레가 크라운 주요주주에 오르면 크라운은 물론 해태제과 경영까지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양측의 마찰은 불 보듯 뻔한 일.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빙그레가 이번에 매입한 전환사채를 해태제과 인수협상 카드로 보고 있기도 하다. 경영권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지분을 확보한 후 해태제과 인수를 조건으로 그 지분을 되팔거나 크라운이 보유하고 있는 해태제과 지분과 교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빙그레의 최종 목표가 해태제과 인수라면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최근 금융위기로 인해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멜라민 파동’으로 해태제과 실적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 해태제과를 인수할 당시 군인공제회와 맺은 풋백옵션과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차입금에 대한 이자비용 등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크라운으로서도 조건만 맞는다면 해태제과를 매각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크라운이 ‘해태제과의 빙과 부문만 따로 떼어내 팔수도 있다’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빙그레가 해태제과의 사업 중에서도 빙과 부문을 특히 욕심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윤영달 회장은 해태제과 인수 당시 빙그레를 의식해 “빙과 부문은 절대 팔지 않겠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윤 회장은 이 말을 지킬 수 있을까.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