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줄고 상금 늘고…‘박진감’ 높인다
지난 17일 막을 올린 제18회 LG배 기왕전. 예선 대국료는 없어지고 상금은 올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당겨지고 짧아졌다. 지금까지 제한시간 각 3시간, 1분 초읽기 5회였는데, 시간은 변함이 없고 초읽기가 1분에서 40초로 줄었다. 초읽기에서 20초면 크다. 대국이 훨씬 스피디해질 수밖에 없다. 대국 시작은 아침 10시에서 9시가 되었고, 2시간이었던 점심시간을 1시간 45분으로 줄였다. 이런 식이면 오후 늦게, 저녁때를 넘겨 끝나는 바둑은 드물게 되었다.
시간을 조정한 것은 이의가 없다. 그런데 예선 대국료를 없앤 상태에서 총 상금 규모가 20% 늘어났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전체 예산 규모가 커지면서 늘어난 것이 아니고 예선 대국료를 상금으로 돌린 효과라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상금 총액이 20% 이상 늘어났다는 말은 좀 그렇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 괜히 조삼모사라는 오해만 받을 소지가 있다. 주최-후원 측에서는 시간을 줄이고, 예선 대국료를 없애면서 보다 박진감 있는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참가자는, 애초에는 한국 222명, 중국 81명, 일본 36명, 대만 18명에 아마추어에서 뽑힌 8명 등 모두 365명으로 지난해 353명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변수가 생겼다. 참가자 중 일부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출전을 포기하거나 예선전 상대가 같은 나라 선수이면 자국 내에서 두고 오는 것을 희망한 것.
일본에서는 고마쓰 히데키 9단(46)과 고마쓰 히데코 4단(51) 부부가 기권했다. 부부가 모처럼 한국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겁이 났던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10명이 자기들끼리 대국하고 결과를 알려왔다. 대만은 2007년 시즌, LG배의 제11회를 제패했던 저우쥔쉰 9단(33), 호주계 빼어난 미녀기사로 세계 바둑계의 사랑을 받는 헤이자자 5단(19)을 비롯해 절반인 9명이 불참을 밝혔다.
불참-기권에 따라 분위기가 뒤숭숭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자리를 찾느라 잠깐 분주한 모습들이었고 뜻밖에 부전승을 거둔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을 뿐 별다른 소요는 없었다. 하긴 외국 언론들에서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보도하고 있는 것에 비해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그런 정도에는 꽤 오래전부터 태연자약해지는 법을 배웠던 것 아닌가. 무심한 우리를 보고 외국 선수들은 의아해 하면서 외신 보도가 과장되었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이변이 속출했다. 한국 신예들이 우승 후보급 중국 강타자 서너 명을 차례로 탈락시킨 것. 2011년 3월에 입단한 최홍윤 2단(21)이 자신이 입단하기 직전인 2월에 제16회 LG배 우승컵을 안았던 장웨이제 9단(22)을 꺾는 기염을 토했고, 나이는 청년이나 서열로는 중견에 진입한 이재웅 7단(28)이 중국 간판스타의 한 사람 쿵제 9단(31)을 제압하며 팡파레를 울렸다. 그런가 하면 아직 신예군에 속하는 이태현 5단(23)은 세계대회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특히 한국 기사들을 괴롭히고 성적도 평균 이상을 유지하는 펑첸 7단(28)을 돌려세웠고, 요즘 어딜 가나 주목받는 신민준(14)-신진서(13) 초단 중에서 신진서는 형님 이정우 8단(32)에게 승점을 올렸다. 신민준은 중국 신예 장웨이 3단(21)에게 아깝게 졌다.
지난해 LG배 모습.
재작년 2011년 3월에는 일본 동북부 앞바다에서 강도 8.9의 엄청난 강진이 일어나 일본기원의 모든 대국이 중단되거나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그런 와중에 제35기 기성전 도전7번기 제6국은 유일하게 진행되었고 타이틀 보유자 장쉬 9단(33)과 도전자 이야마 유타 9단(24)은 대피소로 피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흔들리는 바둑판 위에서 혈투를 벌였다. 장쉬는 그 바둑을 이겼고 통산 4승2패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6·25 전쟁 때 우리의 조남철 선생은 리어카에 바둑판과 바둑책을 싣고 피난을 갔다. 그리고 국군 병사가 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좀 지난 시각, 히로시마의 한 여관에서는 제4기 본인방전 도전6번기(제1기와 3기 때는 특이하게 덤을 채택하지 않았고, 도전기도 6번기였다) 제2국이 두어지고 있었다. 4일에 시작한 바둑이 사흘째로 접어들었다. 대국자는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이와모토 가오루. 당시 하시모토는 8단이었고 타이틀 보유자였다. 이와모토는 도전자였고 7단이었다. 하시모토는 우칭위엔, 조훈현과 함께 세고에 겐사쿠 문하생 3천재이고, 관서기원의 설립자다. 이와모토는 부산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1940년대부터 사재를 털어 미국 유럽 브라질 등 해외에, 특히 남미 쪽 바둑 보급에 정열을 기울인, 바둑 세계화의 선구자요 공로자다.
“…바둑판을 닦고 어제까지 두어진 바둑을 놓고 있을 때 멀리서 섬광이 일었다. 섬광은 3초쯤 계속되었고 곧이어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쳤다. 유리창이 박살났고 우리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와모토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히로시마 시민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자폭탄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경찰이 왔고 그가 우리를 다른 장소로 안내했다. 우리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 당시를 회고한 기록이다.
바둑은 하시모토가 이겨 1 대 1이 되었다. 6번기의 결과는 3 대 3. 그런데 기록에는 이와모토의 우승으로 되어 있다. 무슨 규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와모토는 이듬해 기타니 미노루 8단(당시)의 도전을 물리쳐 타이틀을 한 차례 방어했으나 그 이듬해 하시모토에게 빼앗기자, “살아남는다면 바둑을 세계 평화를 위한 도구로 쓰리라”고 다짐했던, 2년 전의 그 결심을 되새기며 해외보급에 나선다. 뉴욕 바둑센터, 시애틀 바둑센터, 유럽 문화센터 등은 그의 힘으로 세워진 것들이니 그는 자신의 결심을 훌륭하게 실천에 옮긴 셈이다.
서구에서 바둑이 대접을 받게 된 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와모토 9단 같은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바둑은 그의 소원대로 세계 평화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다시 궁금해진다. 바둑을 세계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자존을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대국료 몇 푼 갖고 승부의 박진감 어쩌구 하면서 장난칠 일이 아니다. 바둑을 노름으로 보면 그럴 수 있고, 스스로 천격이 되고 싶으면 그래도 되겠지만.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