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 교우회 이사를 하는 친구가 걱정하는 말을 들었다. 교우회장이 뻔질나게 일등석을 타고 해외출장을 다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회장과 친하니까 바른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무슨 협회 회장들 중에서도 그런 파렴치한 인간들이 많다. 회원들의 무관심을 틈타서 회비로 모은 돈을 개인용도에 마음대로 쓴다. 감사를 구슬리고 장부조작을 하면 의외로 그런 일들이 쉬운 것 같다.
기부로 만들어진 재단에 대한 감시시스템이 엉망이다. 노회한 이사장이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이사로 만들어 마음대로 전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의 통제는 서류 제출에 그친다.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패거리를 동원해 쫓아 버리면 된다.
<월간조선> 4월호에서 특이한 추적 기사를 읽었다. KBS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감동을 받은 강태원 옹이 평생 모은 평택 농장을 포함한 270억 원을 기부했다. 불쌍한 노인들을 위해 써달라는 취지였다. 부산 부두노동자 출신인 강태원 옹은 청계천 판잣집에 살면서 노점상으로 한푼 두푼 돈을 모은 사람이었다. 개인으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기부자였고 대통령까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전했었다.
그런데 추적 기사는 기부자의 뜻이 전혀 무시된 채 방송국 관계자가 재단을 만들고 그 돈이 엉뚱하게 프로그램 제작에 사용된 것을 고발하고 있었다. 그 재단은 방송국 퇴직 직원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고 꼬집고 있다.
한술 더 뜬 게 있었다. 사회 원로라는 명사가 이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기부자의 뜻에 따른 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재단은 20억여 원의 세금을 두들겨 맞았다. 사업을 게을리한 데 대한 제재였다. 부둣가에서 값싼 쉰 떡을 먹어가며 번 돈을 기부한 노인의 꿈은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스러졌다.
재단의 이사였던 전직 서울대 교수는 죽은 노인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 관계자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그 단체의 감사였던 변호사는 “형식논리를 앞세워 책임회피에 급급한 파렴치한 이사장 때문”이라고 진정서를 쓰기도 했다. 그 재단의 자문위원들은 우군을 이사로 박고 비영리법인을 자기 것처럼 독단적으로 하는 이사장을 성토했다. 그런데도 끄떡도 하지 않고 그 재단은 존재하고 흘러간다.
이런 문제는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좋은 일을 목표로 하는 재단법인이 있다. 좋은 결과를 추수하려면 성실한 일꾼이 있어야 한다. 명함에 되지도 않은 수많은 직함을 박아가지고 이사 자리라도 하나 얻으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일이 아니라 이사장 자리 그 자체만을 보고 덤벼드는 속물들도 많다.
그런 가라지들이 재단을 차고앉으면 기부자의 피와 땀은 그들의 허영심과 몇몇 직원 먹여 살리는 헛된 돈이 되고 만다. 우리의 기부문화가 꽃피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감시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패거리들이 재단을 농락하는 현상이 없어져야 한다. 서류 제출만 요구하고 무사안일로 가는 행정감독 속에 독버섯들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변호사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