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놓고 치열한 ‘감정싸움’
▲ 한국감정원(왼쪽)과 한국감정평가협회 전경.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감정원과 감정협회의 ‘감정싸움’ 발단은 국회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11월 김성태 한나라당 의원은 ‘부동산 가격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에 대해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동안 감정협회가 해오던 부동산 가격공시 및 부대 업무를 감정원으로 변경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김 의원 측은 “민간 감정평가업자들의 비리가 도를 넘었다”며 “감정가격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고 부동산 거래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김성순 민주당 의원도 비슷한 내용의 법률 개정안들을 제출했다. ‘업무위탁의 대상기관을 감정협회 등 민간단체에서 공공기관인 감정원으로 변경함’도 그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감정협회와 감정원을 거론한 것이다. 이밖에 지자체가 산정한 개별 토지 및 개별 주택가격에 대한 타당성 검증 업무도 감정원만이 독점적으로 하도록 했다. 김 의원 측은 “감정원은 정부가 출자한 지 39년이 됐지만 아직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이러한 법률을 발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연이어 감정원에 유리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자 감정협회는 벌집을 쑤신 듯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감정협회 소속 감정평가사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자리에 참여했던 한 감정평가사는 “그동안 감정원에서 수도 없이 주장하던 것들이라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국회가 나섰다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업 등 강력하게 대처하자는 주장들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던 중 감정협회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박기춘 민주당 의원이 앞서의 두 의원이 냈던 것과는 반대의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감정협회의 설립 근거를 명문화하고 감정평가사의 협회 가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또 감정협회가 운용하고 있는 ‘공적평가심사위원회’를 ‘감정평가심사위원회’로 바꿔 이를 법제화하도록 했다. 박 의원 측은 “감정협회가 사실상 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국회의원들 간 대리전 양상을 띠던 감정원과 감정협회의 대립구도는 이제 정면충돌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감정원과 감정협회는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이 통과되도록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우호적인 여론 조성은 물론 법률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도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양측의 일부 인사들은 상대방을 향해 마타도어 식의 비난을 퍼붓고 있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 감정원과 감정협회는 사사건건 부딪혀왔다. 업계에서 이번 싸움을 ‘해묵은 감정싸움의 표출’이라고 보고 있다. 태생은 다르지만 업무 영역이 중복되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는 것이다. 1969년 설립된 감정원은 기획재정부(지분율 49.4%)와 산업은행(30.6%)이 최대주주인 공기업. 반면 감정협회는 1989년 감정평가사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민간단체다.
감정원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필요해서 만든 공기업을 두고 민간단체에 일을 주는 것은 예산 낭비”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감정협회 관계자는 “감정원에 비해 협회에 소속된 감정평가사들이 15배 이상 많기 때문에 나타난 점유율이나 효율성 면에서는 우리가 훨씬 낫다”고 반박했다.
또한 감정원은 감정협회에게 감정평가를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감정평가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것은 통제가 잘 되지 않고 법규가 구비돼 있지 않은 민간단체가 감정평가를 맡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감정원은 감정평가사들의 비리 사례집을 만들어 최대한 부각시킨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감정협회는 ‘자기 머리는 자기가 못 깎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국가가 토지를 매입하면서 국가가 가격을 매길 경우 정확한 산정이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뤄지고 있는 일부 평가에서조차 감정원을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감정원의 기능 확대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어긋난다는 것을 집중 홍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감정원과 감정협회는 조직의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학계 및 업계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학교수(부동산학)는 “경제위기로 어려운 이때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경우 국민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감정평가 업무가 뒤죽박죽된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따라서 양측이 다툴 것이 아니라 제삼자 혹은 정부가 책임을 지고 문제를 풀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부동산학과 교수도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설령 감정원이 감정평가 기능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감정협회 도움 없이는 일을 하기가 힘들다. 감정협회 역시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해서는 감정원이나 정부 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양건)도 감정평가와 관련한 논란이 커지자 제도개선을 권고하고 나섰다. 감정원의 감정평가 기능은 감정협회로 이양하되 감정평가업자 선정과 평가 등은 중립적인 제삼의 기관에 일임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다.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는 “그동안 감정원은 기획재정부와 국토해양부의 퇴직 관리가 가는 ‘보은처’로 여겨졌다. 감정협회 역시 각종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양측은 어떤 것이 국민의 권익에 보탬이 되는 것인지 중지를 모으고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