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간’에 살아… ‘중’이 못오게… 의원 때도 ‘종교설화’ 곤욕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민대화합과 경제발전을 위한 기도회’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의 ‘기독교 편향’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예고탄을 쐈다. 이른바 ‘서울시 봉헌’ 발언 논란이다. 2004년 5월 30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서 당시 이명박 시장은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직접 낭독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이명박의 친 기독교 발언은 국회의원 이명박의 입에서 이미 나온 바 있다. 때는 1996년. 기독교TV가 ‘이명박 의원 초청 신앙강좌’를 마련했는데 그곳에서 이명박은 사찰을 ‘절간’으로, 스님을 ‘중’으로 표현했다.
“저희는 어머님이 그렇게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산(살게 된) 집이 ‘절간’이었습니다. 그 절에 ‘중’이 떠난 다음에 모두 몰리(몰려) 들어가 ‘중’이 다시 못 오게 만들었습니다.”
이 발언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잠시 문제가 됐다. 당시 이 시장 후보는 불교방송에서 “소문은 사실무근이며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밝혔지만 이후 불교계의 인터넷 언론인 불교정보센터가 방송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이명박의 해명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명박의 ‘화법’은 철저한 ‘자기 확신’ 내지는 ‘자기 자만’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내가 해봤으니 아는데” “내가 한때 말이야” 등을 서두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명박 화술 스타일’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 대통령까지 오른 ‘자수성가’에 대한 자신감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천하의 이명박이가 이 나이에 안 해본 게 어디 있고, 모르는 게 뭐 있겠나라는 심리가 담겨 있다. 밥을 굶기도 해봤고, 달동네에서도 살아봤고, 고학도 경험했다. 사회 밑바닥 중 안 해본 일이 없다. 데모하다 감옥에도 다녀왔고,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도 역임했고, 안 가본 나라도 없고, 국회의원도 해봤고, 테니스와 클래식, 발레 감상 같은 취미생활에다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종교적 봉사활동도 해봤고…가난이나 어려움을 공감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감격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의 ‘나도 한때’ 발언을 찾아보니 이렇게나 많았다.
“학생 때 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다”(2008년 6월 중소기업성공전략회의), “나도 체육인이다. 15년간 수영연맹 회장을 했고, 세계체육연맹 집행위원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 초청 오찬), “내가 어린 시절 노점상을 해봐서 여러분 처지를 잘 안다”(2008년 12월 서민 초청 연찬), “나도 한때 철거민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철거민과 비정규직의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2009년 2월 12일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만찬), “나도 창업했던 소상공인이다.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무엇보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2009년 4월 소상공인 교육생과 만남) 등등.
특히 “나도 기업인 출신으로서 아세안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한 적이 있다”(2009년 5월 한·아세안 최고경영자 정상회의)는 발언은 정말 이명박의 ‘자아도취’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이런 이명박에게도 가끔 ‘무식이 탄로’나 버리는 해프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명박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이외수 씨는 이명박 대선후보의 현충원 방명록 글을 보고 잘못된 맞춤법을 교정해 자신의 홈피에 올렸다.
“내가 옛날에 노점상 할 때는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다. 끽소리도 못하고…. 장사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죽고 뭐… 이렇게 모여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 좋아졌잖아, 세상이.”
이명박의 ‘멜라민 발언’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2008년 이명박은 ‘멜라민 파동’이 일자 직접 식품의약품안전청을 방문했다. 당시 식약청장이 “(성인의) 반 치사량이 3그램 정도이고, 굉장히 많은 양을 먹어도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영아의 경우 (분유 등) 멜라민을 다량 섭취하면 사망…”이라고 보고했다. 그 뒤 이명박은 한 과자 봉지를 들어 보이며 “근데 이게… 뒤에 설명이 잘 붙어 있어요? 멜라민이란 말이 없네”라고 답한다. 멜라민 성분을 표시하지 않은 제품이 문제가 돼 방문한 것인데 제품에 왜 멜라민이라는 표시가 없냐고 되물은 것이다.
이명박은 재임 중 ‘경인 아라뱃길 사업현장 보고회’에서도 “4면의 바다를 가진 대한민국이 바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 역사의 과오”라는 말실수를 했다. 네티즌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4면으로 둘러싸인 섬나라’라는 각종 패러디가 줄을 이었다.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이명박과 부인 김윤옥 씨가 한국 여자핸드볼 경기 관람 중 태극문양이 거꾸로 뒤집힌 태극기를 들고 열심히 응원하는 장면이 캡처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일부 누리꾼은 국기를 거꾸로 하는 것은 그 국가에 대한 모욕이며 스스로 굴욕을 표현한 것이라며 캡처 사진을 퍼 나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명박의 한글 맞춤법은 어땠을까.
취임식 때 쓴 방명록에도 맞춤법이 틀려 있다.
‘3·15 정신으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화와 국가번영을 이루어지기 기원합니다’ (2007년 3월 23일 마산 국립3·15민주묘지 방명록), ‘충무공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후손들에게 늘 깊게 전해주리라 믿습니다’ (2007년 4월 4일 충남 아산 현충사 방명록), ‘반드시 경제살리고, 사회통합 이루어 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살려서, 크게 보답하겠읍니다’ (2007년 10월 22일 광주국립 5·18 민주묘지 방명록) 등의 문장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거나,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고 있었다.
이명박은 잘되면 제 탓, 잘못되면 남 탓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2004년 서울시장 재직 때 중앙버스차로제를 실시하며 혼란이 인 것을 두고 “반상회를 해서 내용을 알려줬지만 (시민들이) 관심도 없었다. 그나마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잘 타고 다닌다”고 밝힌 적도 있다.
이명박의 목소리와 말투는 결코 친근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명박으로선 참 딱한 일이었다. 쇳소리가 나는 탁한 음성과 사투리가 섞인 불분명한 발음은 항상 화젯거리였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1 대 1 토론회를 하지 않았던 것,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될 수 있으면 TV 카메라 앞에 서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 스스로 목소리가 친근감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대선 당시 앵커 출신의 정동영 후보는 화술이 너무 뛰어나 ‘정치 수사’만 돋보였다. 어눌해 보였던 이명박으로선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심금을 울리지 못한 연설들, 내용은 좋지만 꼭 한 군데씩 틀린 맞춤법으로는 국민의 심리적 위기감을 치유하고, 국민적 단결을 끌어내는 국가 지도자의 능력으로는 큰 흠결이었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MB의 언행불일치
국민과 언론이 왜 사사건건 이명박의 언행을 비판했을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스스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스스로 무게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경선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고 이명박을 돕기로 했다. 이명박 후보는 BBK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와 이회창의 출마 강행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해 11월 11일 “정권 창출 이후에도 주요한 국정 현안을 협의하는 정치적 파트너로서, 소중한 동반자로서 (박근혜와) 함께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화답하듯 그 이튿날 박근혜는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서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총선 공천작업에서 이명박계 등 주류는 친박근혜 세력을 대폭 물갈이했다. 박근혜의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됐고, 이명박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만다.
국민과 언론이 왜 사사건건 이명박의 언행을 비판했을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스스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스스로 무게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경선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고 이명박을 돕기로 했다. 이명박 후보는 BBK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와 이회창의 출마 강행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해 11월 11일 “정권 창출 이후에도 주요한 국정 현안을 협의하는 정치적 파트너로서, 소중한 동반자로서 (박근혜와) 함께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화답하듯 그 이튿날 박근혜는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서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총선 공천작업에서 이명박계 등 주류는 친박근혜 세력을 대폭 물갈이했다. 박근혜의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됐고, 이명박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