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사리던 왕개미들 증시로 이동 중
▲ 여의도 증권가에 모여 있는 증권사들 | ||
시장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고수익을 쫓아다니는 뭉칫돈을 금융시장에선 ‘스마트머니’라고 부른다. 금융시장에 대한 판단력과 정보를 갖고 일반 투자자보다 앞서 움직이는 돈이라는 의미다. 최근 스마트머니가 단기금융 상품에서 주식이나 회사채, 고금리 투자 상품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 투자자들도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닐까. 최근 스마트머니의 움직임과 대응전략을 따져봤다.
지난 3월 중순 한 증권사 기업금융팀 사무실은 갑자기 쏟아지는 전화벨 소리에 시끄러워졌다. 기아자동차 신주인수권부사채(BW) 청약이 시작되면서 전화 문의와 청약 주문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우리투자증권이 주관한 4000억 원 규모의 기아차 BW 청약에 단 이틀 만에 무려 8조 원이 몰렸다. 개인투자자 대상 청약은 7.4 대 1, 기관 및 외국인은 49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일부 개인 고객은 경쟁률이 높아질 것에 대비해 수억 원을 들고 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바로 자동차업계인데, 왜 기아차 BW 청약엔 수조 원의 자금이 몰렸을까. 우선 기아차 BW를 사면 확정이자를 받는 ‘채권’과 기아차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인 ‘워런트’(Warrant)를 함께 받는다. 안정적인 채권이자를 받으면서 나중에 주가가 오르면 차익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채권은 연 1%의 표면금리가 3개월마다 지급되며, 3년 만기까지 보유하면 만기일에 원금 대비 14.56%의 이자를 추가로 받는다. 여기에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가격은 주당 6880원이었다. 청약 당시 주가 8000원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어서 투자 매력도가 높았다. 투자자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증시 급등에 힘입어 최근 기아차 주가가 1만 1350원(6일 종가 기준)까지 치솟아 두 달 만에 주식에서만 64.97%의 고수익을 거둔 셈이다.
기아차 BW의 성공적인 발행에 힘입어 한 단계 신용 등급이 낮아 위험자산으로 분류됐던 대우자동차판매 BW 발행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우자판의 BW에는 청약금액 600억 원에 시중자금이 4조 7000억 원이나 몰리면서 청약경쟁률이 79 대 1에 달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올 들어 대기업 관련 회사채 발행에서도 드러난다. 지난달 일반회사채는 6조 4110억 원어치가 발행돼 지난해 4월보다 204%나 급증했다. 대우조선해양(5000억 원) 현대중공업(3000억 원) 삼성전기(3000억 원) 등이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무난하게 조달했다. 대기업들의 주식 관련 사채와 회사채에 수조 원의 개인자금이 몰린 결과다.
한국투자증권 여의도 PB센터에는 최근 주식에 투자해달라며 수십억 원의 뭉칫돈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뭉칫돈의 주인들은 대체로 주식시장이 조정을 받게 되면 과감하게 투자하겠다는 고액 자산가들이라는 게 회사 측 얘기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증시 관계자들은 ‘왕개미’들의 귀환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4월에 1억 원 또는 1만 주 이상을 한꺼번에 거래하는 일평균 대량주문 건수는 3월에 비해 금액 기준 94%, 주식 수로는 41%의 급증세를 보였다. 1억 원 이상 하루 평균 주문건수는 올 들어 1월과 2월 각각 6798건과 6099건이었으며 3월에도 7280건이었으나 4월에는 1만 4125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에는 고객예탁금이 15조 원대로 높아졌으며 연일 10조 원을 넘고 있는 거래대금에 힘입어 주식시장은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한파를 피해 투자시장을 등졌던 개인 ‘큰손’들의 복귀 움직임이 뚜렷해지면서 투자시장 전반의 회복 시기가 예상보다 앞당겨질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명품PB센터 관계자는 “지난해 말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머니마켓펀드(MMF), 정기예금 등 안전자산으로 옮겨갔던 큰손들의 자금이 연초 이후 우량회사채와 채권형펀드를 거쳐 최근에는 건설, 은행, 증권업종 등의 주식으로까지 투자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공개(IPO)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달 증시에 새로 상장한 기업은 10개사로 이들의 IPO 공모금액은 882억 원에 달했다. 공모주 청약에만 1조 4000억 원이 몰렸다. 상장기업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코스피지수가 2000포인트 선을 돌파했던 2007년 10월(17개사) 이후 1년 6개월 만이다. 또 공모금액은 지난해 7월(2413억 원) 이후 최대치다. 이들 공모주에 대한 청약 경쟁률도 치솟고 있다. 보통 1000 대 1을 가볍게 웃돌고 있다.
성진경 대신증권 시장전략팀장은 “최근 공모주 청약의 뜨거운 열기는 그 동안 안전자산 중심의 투자에 머물렀던 투자자들이 매력적인 밸류에이션(기업가치)을 갖춘 투자처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투자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금융자산 흐름 역시 국내 상황과 비슷하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이나 우량채권, 원금보장성예금 등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글로벌 자금이 고위험 고수익 금융상품으로 이동하고 있다. 위험성과 수익률이 매우 높은 BB등급 이하의 미국 하이일드채권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53억 9500만 달러가 발행됐다. 이는 지난해 4분기 발행액 34억 3000만 달러보다 약 20억 달러나 많은 금액이다. 올 1분기에도 3개월 동안 126억 2700만 달러가 시장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행금액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신용경색 완화와 풍부한 유동성, 투자심리 회복에 따른 자금이동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시중자금 이동이 저금리 기조, 투자자산의 위험 감소, 시중 유동성 증가 등의 이유로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조병현 동양종합금융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도 회사채, 특히 비우량채인 하이일드채권 발행 물량이 늘어나는 등 글로벌 투자자들이 리스크(위험)를 감수하면서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분기부터 실물경기 침체가 가속화될 경우 자산시장에 몰렸던 투기성 자금들이 금융자산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금융당국의 유동성 공급으로 시중자금이 넘쳐나지만 실물경제 쪽으로는 흘러들어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며 ‘유동성 함정’(실적보다는 시중의 자금이 크게 늘면서 주가가 상승하는 현상)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 투자자들이 무작정 따라 하기에는 아직 위험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왕개미들의 증시 복귀는 증시 변동성을 확대해 국내 자본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개인의 직접투자가 증시를 좌우하면 주식의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괴리가 커져 증시 변동성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우 대우증권 연구원은 “증시가 불안해지면 안정적인 자본이 들어오지 않아 국내 증시가 외국인의 투기장으로 변할 수 있다”며 “결국 대규모 자금이 장기간 기업에 공급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자본시장도 후퇴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류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