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론 만년 3등 탈피 안으론 후계 교통정리
▲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사진)이 지주사 (주)LG 지분 7.68%를 보유해 구본무 회장에 이어 2대주주에 올라있다. | ||
지난 5월 13일 LG데이콤-LG파워콤 합병설에 대한 유가증권시장본부의 조회공시 요구가 있었다. 이에 양사는 즉각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통해 ‘통신시장의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합병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미 양사의 합병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합병선언’ 시기 저울질만이 남았다는 평가다.
사실 업계에선 두 회사의 합병이 지난 4월 중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LG 사정에 밝은 인사들에 따르면 4월 중 합병선언이 예정돼 있었으나 그룹 최고위층에서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미뤄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연 배경을 합병작업 전면 재검토로 보기는 어렵다. 두 회사의 합병 가능성은 지난 2002년 11월 LG데이콤이 파워콤을 인수할 때부터 시장에서 줄곧 제기돼 왔다. 지난해 말 LG파워콤이 상장되면서 이미 상장돼 있는 LG데이콤과의 합병을 용이하게 하려 한다는 기대감에 데이콤의 주가가 치솟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합병 범위에 LG텔레콤까지 집어넣기 위해 데이콤-파워콤 합병선언을 미뤄둔 것 아니냐’는 시각을 내놓는다. KT가 KTF와의 합병을 통해 유무선 통합 강자로 거듭난 마당에 안 그래도 뒤처져 있는 LG가 계열 통신 3사 통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을 미룰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LG가 LG텔레콤을 포함한 3사 통합을 확실하게 치고나가지 못한 것은 이유가 있다. 무선통신시장 판도가 ‘2강 1약’ 체제로 굳어져온 것에 대한 깊은 고민 때문이다. 앞의 2등이 보이지 않는 만년 3등, 그룹 내부에선 ‘과연 무선통신사업을 계속 키워야 하는가’란 자조 섞인 의견마저 나올 정도였단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LG텔레콤은 공격적 투자로 통신 양강에 대한 추격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2월 1855억 원 규모 네트워크 신규시설 투자에 이어 얼마 전엔 SK텔레콤의 고객 가입자를 타깃으로 한 ‘세이브 요금제’를 내놓고 대대적인 판촉에 들어간 상태다.
그룹 내에선 ‘LG파워콤 LG데이콤에 LG텔레콤까지 통합할 경우 사명을 어떻게 해야 하나’란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룹 내 통신 계열사 통합에 LG텔레콤이 포함된다는 건 무선통신시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선시장 인프라를 갖춘 LG데이콤과 인터넷 전화 1위 사업자인 LG파워콤에 무선통신사업자 LG텔레콤을 묶어 KT-KTF 조합에 맞설 대형 유무선 통신사업자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로 비친다.
그런데 LG그룹 통신 3사 통합엔 적지 않은 걸림돌이 있다. 우선 LG텔레콤 9110원, LG데이콤 1만 9450원, LG파워콤 7000원 등 각기 다른 주가 상황(5월 14일 종가 기준)이나 조직개편에 필요한 비용 문제 해결이 간단치 않다. KT-KTF 통합에 맞서 SK텔레콤이 SK브로드밴드를 합병할 것이란 관측이 무성했지만 얼마 전 정만원 SK텔레콤 사장이 직접 나서 “합병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 역시 수천억 원에 달할 합병 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됐다. LG텔레콤-데이콤-파워콤 합병법인이 출범한다 해도 유무선 결합상품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통합KT와 SK텔레콤-SK브로드밴드 조합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LG 통신 3사 합병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배경을 두고 일각에선 구본무 회장의 후계구상과 묶어 풀어보기도 한다. 구 회장은 올 초 정기인사에서 50세의 조준호 부사장을 ㈜LG 대표이사로 선임해 강유식 ㈜LG 부회장이나 남용 LG전자 부회장 같은 60대 ‘노신그룹’을 긴장시켰다. 그룹 내 세대교체 바람은 흔히 총수들의 후계구상과 연결돼 해석되게 마련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신 참모들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2세의 안정적 경영권 승계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수시인사가 주목받아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후계구상과 함께 ‘포스트 구본무’ 시대에 걸맞은 신성장 동력에 대한 고민도 자리 잡고 있을 터. 통신 3사 통합을 통해 지금껏 정체에 빠져 있던 LG의 통신사업의 재도약 발판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후계 관측과 맞물리는 셈이다.
그러나 LG의 후계구도가 아직 선명치 못하다는 점은 또 다른 상상의 갈래를 제공한다. 구본무 회장은 첫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 구광모 씨를 입양, LG가 4세 장손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구광모 씨로의 승계를 공식화하진 않고 있다. LG그룹 안팎에선 만만치 않은 지분과 영향력을 지닌 구 회장 동생 구본준 LG상사 부회장(구자경 명예회장 3남)의 존재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일요신문> 881호 보도).
구본준 부회장은 현재 그룹 지주사 ㈜LG 지분 7.68%를 보유해 구본무 회장(10.60%)에 이은 2대주주에 올라있으며 그룹 내 구 부회장을 따르는 인사들도 제법 많다고 한다. 구광모 씨 지분율은 현재 4.67%. 구본무 회장에 입양된 이후로 수년간 지분율을 크게 늘리면서 지난해 구본식 희성전자 사장(구자경 명예회장 4남, 지분율 4.46%)을 앞질렀지만 아직 구본준 부회장에는 못 미친다. 구광모 씨는 현재 구본무 회장과 구본능 회장(5.01%), 구본준 부회장에 이은 ㈜LG 4대주주다.
LG는 구인회-구자경-구본무 3대에 걸쳐 안정적 장자승계를 위해 장남이 아닌 형제들을 적절히 계열분리시키는 방법을 택해왔다. LG의 한 관계자는 “안정적 승계를 위해 몇 개 사업군을 묶어 분가시키는 방법이 있겠지만 구본준 부회장은 지금의 LG상사 정도로 만족할 인물은 아니다”고 밝힌다. 그렇다고 그룹의 주력인 LG전자나 LG화학을 고려대상으로 볼 수도 없는 일. 이렇다 보니 재계인사들 중 일부는 LG 통신 3사 합병작업이 훗날 안정적 승계작업을 위한 분가용 사업군 만들기라는 해석을 조심스레 내놓기도 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