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센 죽이기’시각 상황만 보면 그럴듯
오심은 야구의 일부분인가, 야구의 적인가. 해마다 오심을 둘러싸고 야구계는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다 한발 나아가 요즘엔 오심을 둘러싼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야구팬은 “심판들이 특정선수를 보복하려고 의도적인 오심을 자행했다”고 주장하고, 야구계 일각에서도 “특정팀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심판들이 오심으로 위장한 편파판정을 했다”고 목소릴 높이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음모론은 사실일까. <일요신문>이 야구계를 뒤덮은 음모론의 실체를 집중 취재했다.
6월 15일 잠실구장에선 넥센과 LG전이 열렸다. 전날까지 4연승을 달리던 LG는 이 경기에서 승리해 5연승을 거둬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가겠다는 계산이었다. 넥센 역시 5연패로 부진했던 터라, 반드시 이 경기를 잡아 연패를 끊을 요량이었다.
양팀은 4회까지 0 대 0 팽팽한 투수전을 펼쳤다. 그러던 5회 말. LG는 2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박용택이 때린 강습타구를 넥센 3루수 김민성이 몸을 날리며 잡아 2루로 송구하면서 득점은 무산되는가 싶었다. 실제로 2루수 서건창은 여유롭게 2루를 밟으며 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2루심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벤치로 걸어가던 넥센 투수 브랜든 나이트는 깜짝 놀라 “What?(뭐라고)”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넥센 염경엽 감독도 벤치에서 뛰쳐나와 “왜 이게 세이프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2루심은 “1루 주자가 먼저 베이스를 밟았다”며 판정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기를 중계하던 케이블TV의 리플레이 화면엔 누가 봐도 서건창의 발이 먼저 2루를 밟았음이 포착됐다.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넥센 코칭스태프는 어쩔 수 없이 벤치로 돌아가야 했다.
나이트는 오심으로 1실점하자 갑자기 평정심을 잃었다. 다음 타자에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고선 이병규에게 만루 홈런을 맞으며 순식간에 6실점했다.
결국 이 경기에서 넥센은 0 대 9로 대패했다. 정작 오심 논란이 뜨거워진 건 경기가 끝난 뒤였다. 결정적 오심에 분노한 야구팬들은 한국야구위원회(KBO) 홈페이지에 찾아가 격렬하게 항의했다.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오심 심판을 비난하는 게시물이 쇄도했다.
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희대의 오심’이란 제하로 KBO 심판진을 비판하는 기사가 주류를 이뤘다. 문제는 이 경기의 오심을 둘러싸고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된 것이었다.
넥센 선발 나이트는 오심으로 1실점하자 평정심을 잃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많은 야구팬들은 넥센-LG전의 오심을 두고 ‘의도적 기획판정’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 가운덴 KBO 심판들이 김병현을 혼내주려고 의도적으로 오심을 범했다는 설이 많았다.
실제로 6월 12일 사직 롯데전에서 넥센 선발투수 김병현은 강판 도중 1루 더그아웃 쪽으로 공을 던져 퇴장당했다. 대개 이럴 때 투수들은 자신을 바꾸려는 투수 코치에게 공을 넘기거나 마운드를 내려오다가 1루수에게 공을 던진다. 그러나 김병현은 다소 이례적으로 그라운드를 거의 벗어나려는 찰나 상대팀 더그아웃 방향으로 공을 던졌다. 가뜩이나 공이 심판 머리 위를 지나가며 심판진은 김병현에게 “우릴 겨냥한 것이냐”며 따져 물었고, 김병현이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지 않자 퇴장을 명했다. 김병현과 넥센 측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KBO 상벌위원회는 김병현에 벌금 200만 원을 지시하며 심판진의 손을 들어줬다.
성난 야구팬들이 “심판들이 치졸하게 김병현에 보복하려고 기획 오심을 저질렀다”고 맹비난한 것도 개연성이 없지 않았다.
야구계에 퍼진 음모론은 달랐다. 이른바 어둠의 세력이 잘나가는 넥센을 끌어 내리려고 심판진을 동원해 넥센에 불리한 판정을 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주류를 이뤘다. 넥센이 가장 경계했던 음모론도 바로 이것이었다.
한 야구인은 “모그룹이 없는 넥센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 대기업이 모체인 다른 프로야구단의 경영층은 윗분들로부터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이냐’는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프로야구단 경영층들 사이에서 넥센의 호성적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모 구단 사장은 사견을 전제로 “넥센이 KBO 이사회에서 아직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인 건 맞다”며 “넥센이 느끼는 피해의식도 일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야구팬들도 “정규 시즌 1위를 달리는 넥센에 위협감을 느낀 거대 구단들이 심판진을 조종해 넥센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인 넥센 입장은 어떨까.
오심 논란 경기 화면 캡처.
넥센은 오심으로 패하자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강력 대응하겠다”고 목소릴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는 오심을 문제 삼지 않겠다. 여러 소문들을 취합했지만, 사실과 다른 것으로 결론내렸다”며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염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16일 새벽 기자는 염 감독과 전화통화를 했다. 당시 염 감독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팬의 성원에 보답하지 못하고 6연패해 죄송할 따름”이라며 사과 인사 먼저 꺼냈다. 하지만, 오심과 관련한 각종 루머를 전달했을 땐 결연한 어조로 “의도적 오심으로 의심할 만한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이유는 뭘까.
염 감독은 “감독 목숨을 걸고 더 항의할까도 생각했지만, 2루심의 표정을 보고 ‘이 친구도 오심인 걸 아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한 번 내린 판정을 번복하지 못하는 심판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염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해당 심판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수화기 너머로 눈물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나. ‘다음부턴 더 정확하게 판정해 달라’고 말하고서 사과를 받아들였다.”
염 감독은 기자와의 통화가 끝날 즈음 “해당 심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달라”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고, 그 실수를 통해 더 큰 교훈을 배우면 된다”는 덕담을 들려줬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