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 리스트’ 쥐고 여의도 정조준
이에 따라 ‘특수통’ 출신의 채동욱 총장이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내놓을 ‘반전 카드’에 관심이 집중된다. 검찰 주변에서는 건설업자 황보연 씨(62)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수한 의혹이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62) 개인비리 사건과 CJ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을 비롯, 검찰이 수사·내사 중인 사건에 대해 정치권을 ‘정조준’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란’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채동욱 검찰총장이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잇단 ‘잡음’에 시달리며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이종현 기자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은 채 총장 취임과 함께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검찰은 채 총장 취임 보름 뒤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을 구성했다. 수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의식한 듯 공안통인 서울중앙지검 2차장 산하에 특수통 출신 검사를 팀장으로 하고 특수부, 공안부 등에서 검사와 수사관을 끌어 모았다.
숨 가쁘게 전개되던 검찰 수사는 지난 대선 선거사범 공소시효 만료일인 6월 19일에 가까워지면서 이상 기류를 띠기 시작했다. 원세훈 전 원장 등 국정원 대선·정치개입 의혹 사건 핵심 당사자들의 사법처리 수위와 적용 혐의를 놓고 법무부와 검찰이 의견차를 보인 것.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원 전 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55)에 대해 공직선거법(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향으로 의견일치를 봤다. 이 같은 내용은 대검찰청 공안기획관을 통해 채 총장에게 보고됐고 채 총장은 ‘수사팀의 판단을 믿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황교안 장관이 검찰의 의견에 난색을 표하면서 시작됐다. 황 장관을 필두로 한 법무부는 수사팀이 발견한 대선 관련 인터넷 댓글 수가 70여 개에 불과해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거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 시기 청와대는 원 전 원장 등에 대해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될 경우 지난 대선과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 논란이 불거질 것을 우려해 선거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법무부에 강하게 피력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검찰은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법무부에 시종일관 끌려 다녔다. 6월 셋째 주 무렵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원 전 원장 등에 대한 사법처리 방안과 수사결과 발표 시점’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법무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수사결과 발표일이 6월 14일 금요일로 결정되자 언론은 일제히 반발했다. 금요일은 대부분의 일간지가 주말용 특별면을 편성하기 때문에 주요 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지면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수사결과 보도를 최대한 축소하기 위한 청와대와 법무부의 ‘꼼수’라는 비판이 일었다. 언론은 수사결과 발표일의 변경을 요구했지만 검찰은 이미 법무부와 청와대에 보고된 날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법무부와 검찰은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되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절충안을 이날 내놨다. 특정 대선 후보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엄벌 의지를 보였던 검찰은 국내 최대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수장이 조직을 동원해 선거와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사상 유례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구속 카드를 꺼내들지도 못한 것이다.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경찰 수사를 방해하고 국정원 여직원 김 씨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분석한 1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폐기하기도 했지만 원 전 원장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불구속 기소됐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6월 4일 민주당 국정원진상조사특위와 법사위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면담 요청을 받는 모습. 황 장관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자는 검찰에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채 총장이 잇따라 시험대에 오르면서 청와대와 정치권에서는 ‘채 총장을 조기에 강판시켜야 한다’는 견제론이 흘러나온다. 다만 채 총장이 취임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데다가 물러나게 할 명분이 없는 점을 고려해 검찰 내 채 총장 주변 인물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는 8월 일부 평검사들에 대한 전보 인사에서 이례적으로 검사장급 인사를 단행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채 총장의 거취는 어쩔 수 없지만 채 총장과 가까운 검사장급 검사들의 인사를 통해 총장을 압박하겠다는 계산이다.
채 총장은 지난달 25일 한국전쟁 발발 63주년과 휴전 60주년을 맞아 경기도평택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하고 천안함 희생자 묘역에 헌화했다. NLL 포기 발언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사정기관의 총수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면서까지 청와대에 ‘구애’를 한 것이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채 총장은 지난해 검란 사태의 ‘구원 투수’로 등장했지만 청와대 등 정치권-법무부-검찰로 이어지는 틈새에서 검찰 안팎의 갈등 상황만 재확인한 꼴이 돼 버렸다.
이에 따라 채 총장은 검찰 내부 갈등이 지난해 검란 때처럼 불거지기 전에 리더십을 회복하고 사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카드가 필요하다. 결국 수사로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검찰은 원 전 원장이 건설업자 황보연 씨로부터 돈을 건네받은 사건과 CJ그룹 비자금 의혹 등을 수사 중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여환섭)는 서울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황보건설 옛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정·관계 선물 리스트를 확보했다. 이 리스트에는 황 씨가 원 전 원장에게 2009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순금과 명품가방 등 수천만 원 상당의 뇌물을 전달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관계, 금융계, 언론인 등에게 보낸 선물 내역과 시기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다.
이재현 CJ 회장. 이상민 인턴기자
검찰은 4일 원 전 원장을 전격 소환해 조사했으며 수사한 금품의 대가성 여부를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 외에 황씨로부터 금품 로비를 받은 정·관계 인사를 밝히기 위해 관련 계좌를 추적하는 등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또한 검찰은 CJ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재현 회장(53)으로부터 정·관계에 광범위한 로비를 벌여왔다는 진술을 일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 5월 CJ그룹 본사와 이 회장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이 회장이 정치권 인사들을 지원한 기부금 명단을 입수했다. 명단에는 새누리당 의원 13명, 민주당 의원 3명의 이름이 적혀있고 대부분 500만 원 이하의 후원금이 지속적으로 입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새누리당의 경우 경북 지역 의원이 대부분이었고 대구 지역 의원도 포함됐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CJ그룹 이재현 회장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정치권으로 현금과 그림 등이 흘러들어간 정황을 이미 포착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대기업 오너의 개인 비리에서 시작된 검찰 수사가 여의도 정치권과 전·현 정부 관계자들을 정조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특수통 검사들의 정치권 수사는 일단 한 번 시작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휘발성을 갖고 있다”며 “실제 수사로 이어지게 되면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부담이 큰 정·관계 로비 의혹이 아니더라도 채 총장은 이미 축적된 검찰 내부 첩보를 이용한 기업 수사를 통해 반전을 꾀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검찰은 H 사, 또 다른 H 사, P 사, L 사 등에 대한 수사 첩보를 상당부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D 사의 경우 회사 임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한 뒤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하고 내사 중이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해 혼란을 겪은 검찰이 상반기 몇몇 수사를 통해 충분히 워밍업을 했다”며 “하반기에는 검찰 본연의 역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대형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희 언론인
검찰 ‘골프 금지령’ 까닭
칼 뽑기 전 ‘내부 단속’
채동욱 검찰총장이 국정원 대선·정치개입 의혹 사건 처리과정에서 생채기가 난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채 총장은 올해 하반기에 더욱 거세질 검찰의 사정 ‘칼바람’에 앞서 내부 단속에 나섰다. 채 총장은 지난 2일 열린 간부회의에서 골프와 ‘룸살롱’ 등 국민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여가활동을 자제하도록 했다.
검찰이 수집한 첩보를 바탕으로 대기업 오너에서 출발한 수사가 정·관계 로비를 규명하는 데까지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채 총장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여가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늘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사생활을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검찰 고위 간부들은 채 총장의 발언이 ‘룸살롱’ 등 고급 유흥업소 출입과 골프를 금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채 총장의 발언을 접한 검찰 간부들은 일선 검사들에게 각별한 사생활 관리를 당부하기도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앞선 수사로 인해 채 총장과 검찰이 청와대와 국회, 국정원, 경찰 등으로부터 모두 지탄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며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내부 분란을 봉합하고 반격 카드를 내놓기 위해서는 우선 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이승희 언론인
칼 뽑기 전 ‘내부 단속’
채동욱 검찰총장이 국정원 대선·정치개입 의혹 사건 처리과정에서 생채기가 난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채 총장은 올해 하반기에 더욱 거세질 검찰의 사정 ‘칼바람’에 앞서 내부 단속에 나섰다. 채 총장은 지난 2일 열린 간부회의에서 골프와 ‘룸살롱’ 등 국민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여가활동을 자제하도록 했다.
검찰이 수집한 첩보를 바탕으로 대기업 오너에서 출발한 수사가 정·관계 로비를 규명하는 데까지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채 총장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여가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늘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사생활을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검찰 고위 간부들은 채 총장의 발언이 ‘룸살롱’ 등 고급 유흥업소 출입과 골프를 금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채 총장의 발언을 접한 검찰 간부들은 일선 검사들에게 각별한 사생활 관리를 당부하기도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앞선 수사로 인해 채 총장과 검찰이 청와대와 국회, 국정원, 경찰 등으로부터 모두 지탄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며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내부 분란을 봉합하고 반격 카드를 내놓기 위해서는 우선 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이승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