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4일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의 원희룡 의원(왼쪽)과 최병렬 대표. ‘인적청산’을 외치는 소장파와 최 대표가 최근 ‘중진 물갈이’를 위한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 | ||
한나라당 인사들은 최병렬 대표가 당내 소장파들을 전위부대로 내세워 ‘당 물갈이’ 깃발을 높이 올리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남경필 오세훈 원희룡 박진 등 당내 주축 소장파 의원들은 국감 기간 동안에도 최 대표와 자주 면담을 하고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대부분 당 운영위원이거나 주요 당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대표와의 수시 접촉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일부 한나라당 인사들은 “당의 총력을 기울여야 할 국감 기간 동안에 최 대표의 당내 물갈이와 관련된 언급이 너무 잦은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국감 기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측근, 친인척 등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의원들을 빼고 나머지는 온통 내년 총선에 신경 쓰느라 이번 국감 분위기가 너무 썰렁했다”며 “최 대표도 그렇고 소장파도 국감보다는 물갈이 논의에 대해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 대표는 지난 9월29일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당의 배경이 되는 산업화 세력의 날개 밑에 부패한 사람들, 인권 탄압에 관여한 사람들, 국민이 보기에 무능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함께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당은 이제 이런 것으로부터 몸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해 대대적인 ‘물갈이’ 의사를 내비쳤다. 이후 지난 6일 대표 취임 1백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최 대표는 “11월 한 달은 우리 당에 물갈이론을 포함해 여러 가지 고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물갈이’란 말을 구체적으로 입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비판적 시각을 감수하면서도 최 대표가 이렇듯 물갈이 화두를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가에선 ‘최 대표가 당 중진들에 대한 부담감을 하루빨리 떨쳐버리기 위해 물갈이 총대를 멘 소장파 의원들을 독려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돌고 있다. 최 대표는 지난 6월 당대표 경선에서 당 중진 의원들의 절대적 도움을 바탕으로 당선이 됐다. 경선 기간 내내 ‘당 개혁’을 외쳐온 최 대표로선 여간 부담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당 개혁을 부르짖으며 인적 청산을 외친 소장파 의원들의 ‘봉기’가 최 대표에게 천군만마가 돼 주었다는 것. 최 대표 본인도 물갈이에 대한 언급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흘려줌으로써 소장파 의원들에게 화답했다는 지적이다.
소장파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최 대표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보이지 않게 소장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아니겠나”라고 지적했다. 중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내 기반이 약한 소장파로서도 ‘최 대표 배후설’이 나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러한 시각을 의식한 탓인지 얼마전 소장파 오세훈 의원은 기자간담회에서 “(물갈이 대상에서) 대표도 예외일 순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기자들 사이에선 ‘최틀러-소장파’ 교감설을 이미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오 의원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몇몇 기자는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 의원이 먼저 최 대표를 언급했다. 그러니 ‘최 대표 배후설’이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 소장파 의원은 “최 대표가 구 정치인이며 5·6공 세력임에는 틀림없지만 대표가 앞장 서서 물갈이를 단행한 뒤 대표 스스로 욕심 없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밝혔다.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 대표를 ‘등에 업겠다’는 뜻인 셈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선 중진들의 힘이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크게 발휘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당의 근간인 영남권 지지도와 보수 세력을 등에 업은 당 중진들을 최 대표가 결국 내치지 못할 것이란 시각이다. 얼마 전 불거진 ‘내각제 논란’이 그 단적인 예로 지적된다. 내각제 개헌론에 불을 지핀 한나라당 신경식 의원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최 대표와 소장파의 교감을 지켜보는 중진들이 최 대표에 대한 압박용으로 내각제 카드를 꺼내든 것 아니겠나”라고 지적한다. 정국개편까지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 중진들이 ‘당내 소장파 대신 JP를 끌어안고 갈 수도 있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이란 시각이다.
▲ 김종필 자민련 총재 | ||
‘당 중진들이 소장파 대신 JP를 안고 가려 한다’는 해석은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제기되는 중이다. 지난 대표 경선 막판에서 최 대표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진 한 중진 의원은 “통합신당이 출범했지만 그 지지도가 형편없다. 준비가 되지 않은 일부 개혁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싸늘해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총선을 앞두고 우리 당 소장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지적했다. 이 중진 의원은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굳이 1백50석 가까이 가질 필요가 없다. 어느 정도 의석 수를 손해 보더라도 내년 총선에서 JP가 교섭단체 구성(20석)에 성공한다면 당의 주류에 어긋나는 세력을 쳐내고 자민련과 정책 연합을 펼치는 것이 차기 대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민련과의 정책연합 가능성에 대해 소장파 인사들은 고개를 크게 가로젓고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JP와의 연합 가능성이 보도되는 것조차 우리 당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소장파가 최 대표를 등에 업은 것에 대해 중진들이 JP 카드로 맞불을 놓는다면 당장은 여론이 소장파의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할 것이 확실하다면 총선에서
얼마나 의석 수를 늘리느냐보다 대선을 향한 교두보 마련이 중요한 것 아닌가. 지난 대선 말미에 JP를 영입하지 못한 것이 대선 패배 원인 중 하나로 꼽힌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JP 카드’ 이외에 중진들이 거론할 수 있는 카드로는 이회창 전 총재와 서청원 전 대표가 꼽힌다. 이 전 총재는 10월 말 부친 기일을 맞이해 일시 귀국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언론은 이 전 총재와 최 대표 간의 함수관계에 대한 보도를 또 쏟아낼 것이다. 이 전 총재가 ‘최 대표 중심으로 당이 나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지만 최 대표를 압박하려는 중진들이 이 전 총재에게 구애의 손길을 뻗칠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내부에선 일부 중진 의원들이 이 전 총재 측근들을 내년 총선에 출마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표 경선 당시 최 대표를 도운 이 전 총재 측근인사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이들 ‘창 측근들’이 총선을 통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할 경우 이들이 끝까지 ‘최 대표를 주군으로 섬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지적이다. 지난 대표 경선 이후 최 대표와 앙금이 가시지 않은 서청원 전 대표 역시 중진들이 ‘안티 최틀러 진영’을 구축할 경우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결국 최 대표가 중진들을 껴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적 이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잠재돼 있는 최 대표와 소장파 의원들 간의 ‘불안한 동거’가 머지않아 끝날 것으로 보는 시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