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이 버린 패 옆집선 ‘히든카드’
▲ 현재 법정관리 중인 쌍용차 평택 본사.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재완 전 현대차 상품기획본부장(57)과 최종식 전 현대차 미국법인장(59)은 지난 4일자로 쌍용차에서 각각 상품개발본부장, 글로벌마케팅본부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직급은 현대차 퇴직 당시와 마찬가지인 부사장급. 현대차에서 이 정도 고위급을 지낸 인사가 국내 다른 자동차 업체로 자리를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퇴직한 고위임원들은 현대차 협력업체로 가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일이 ‘관례’였다.
업계에선 이 같은 이례적 상황의 배경으로 이유일 쌍용차 공동 법정관리인이 과거 현대차 사장으로 재직했던 인연을 꼽기도 한다. 이 관리인은 1969년 현대차에 입사해 캐나다 미국 등 해외법인장을 거쳐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을 지냈다. 이후 1999년 3월 정몽구 회장이 숙부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에게서 현대차 경영권을 넘겨받은 직후 현대산업개발로 옮겨 해외담당 사장과 호텔아이파크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어 이 관리인은 지난해 2월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접어들면서 박영태 전 쌍용차 상무와 함께 공동관리인에 부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업계에선 쌍용차 출신이 아닌 이유일 관리인이 조직 장악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요직에서 자신을 떠받쳐줄 현대차 출신을 영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새 임원 선임과정에서 이유일 관리인이 쌍용차 출신 대신 이재완 최종식 두 부사장을 강력 천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쌍용차 측은 “(이유일 관리인이) 그분들을 추천했겠지만 영입 결정은 법원에서 한 것”이라 밝힌다. 현대차 출신 전문가 영입이 이유일 관리인과의 친분 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 이재완 본부장(왼쪽)과 최종식 본부장. | ||
이재완 부사장은 1975년 현대차 입사 이후 33년간 줄곧 상품기획 분야에 몸담은 국내 최고 수준의 자동차 상품전략 전문가다. 현대차의 첫 자체 상품인 ‘포니’에서부터 ‘쏘나타’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으며 일본 도요타가 한때 현대차 상품본부를 벤치마킹하려 했을 정도로 그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이 부사장은 지난 2007년 현대·기아차 상품전략총괄본부장(부사장)에 올랐다가 2008년 1월 부품 계열사 다이모스 부사장으로 옮긴 뒤 그해 말 퇴직했다.
최종식 부사장은 해외영업 전문가다. 1977년 현대차 입사 이후 국내영업본부 마케팅실장과 해외영업본부 수출기획팀장 등을 거쳐 2004년 현대차 미국법인장에 오른 뒤 이듬해 퇴직했다. 현대차 재직 시절 미국 판로 개척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현대차에서 나온 이후엔 중국 화타이(樺太)자동차그룹 부총재 겸 화타이자동차 판매회사 총경리(사장)를 역임했고 지난해엔 영창악기 중국법인장을 지냈을 정도로 중국 영업에도 밝다.
쌍용차가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그들의 이름값만큼이나 크다. 이재완 부사장은 오는 6월 말 출시를 목표로 하는 소형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 ‘C200’(개발명)의 상품성 강화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최종식 부사장은 과거 그의 장기를 살려 쌍용차의 해외 판매망 확대와 마케팅 강화에 주력할 참이다.
이들 두 사람은 한때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인사들이다. 이재완 부사장은 기아차 부사장이던 지난 2005년 2월 사임했다가 6개월 만인 그해 8월 요직인 현대·기아차 마케팅총괄본부장 겸 전략조정실장(부사장)에 임명돼 눈길을 끈 바 있다. 2월 기아차 퇴직 당시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 기아차 부사장(현 현대차 부회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황태자 승계과정을 위한 정 회장 특유의 수시인사에 떠내려갔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6개월 만에 요직에 중용돼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더욱이 정몽구 회장 심중을 잘 읽기로 정평이 나 있던 최한영 당시 전략조정실장 겸 마케팅총괄본부장을 상용차 담당으로 보내고 그 자리를 꿰찬 것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최종식 부사장 역시 2001년 마케팅본부 전무 시절부터 정 회장에게 직접 업무보고를 했을 정도로 정 회장의 신임을 얻는 인물이었다. 미국 현지 시장 개척에 크게 기여한 그룹 내 대표적인 해외통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재완 최종식 두 부사장은 이유일 관리인이 정몽구 회장이 1999년 현대차 총수를 맡은 직후 고 정세영 명예회장을 따라 현대산업개발로 옮겨간 것과는 대조적인 이력을 지닌 셈이다.
이재완 최종식 두 부사장이 현대차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들이었기에 일각에선 현대차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알 법한 이들이 쌍용차행을 택한 것을 우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쌍용차 기술유출 파문으로 현재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인 점이 우려의 시선을 부추기는 것이다.
항간에선 현대차에서 수시로 단행돼 온 이른바 ‘럭비공 인사’가 지난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던 점을 현 상황에 대입해보기도 한다. 이재완 최종식 두 부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잦은 인사 태풍 속에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현대차를 떠나게 된 공통점을 안고 있다. 두 사람 다 높은 성과를 올렸음에도 사장직에 오르지 못한 채 현대차에서 나와야 했다. 이런 까닭에 두 사람의 이번 쌍용차행을 두고 “혹시…” 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에 대해 쌍용차 측은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쌍용차와 현대차는 자동차 플랫폼 등 여러 조건에서 다르다”는 주장이다. 쌍용차 관계자는 “그분들(이재완 최종식 부사장)은 기술개발 분야도 아니며 그분들이 지닌 경험이 쌍용차 회생에 필요해 영입된 것”이라 덧붙인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법정관리 중인 쌍용차가 기술 빼내기 같은 무리수를 두진 않을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현대차에서 꿈을 못 다 꽃피운 이들 두 사람이 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위기의 쌍용차를 부활로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