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따가워도 ‘할 일은 많다’
▲ 2009년 3월 대우그룹 출범 4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이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
김 전 회장이 국내 언론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해 10월 19일 옛 ‘대우맨’들이 모여 만든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연구회) 창립총회에서다. 베트남에 있던 김 전 회장은 당시 육성이 담긴 영상 편지를 연구회 측에 보냈다고 한다. 다음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가 전해준 김 전 회장 육성 편지의 주요 내용이다.
“여러분과 함께 세계시장을 개척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몸이 힘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행복했었던 것 같다. 비록 뜻하지 않은 사태로 인해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 여한이 없다. 경영인으로서 회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동안 여의치 않아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만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분과 연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겠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김 전 회장이 국내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김 전 회장이 재기를 생각했던 것은 현 정권 출범 직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9년 3월 대우그룹 창립 42주년 기념식장에 대우그룹 해체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 인사들에게 이러한 뜻을 조심스럽게 나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9년엔 세계 경영 이념을 체계화하고 전직 대우 직원들의 네트워크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회’ 막후에 김 전 회장이 있을 것이란 소문도 들렸다. 김 전 회장의 이러한 움직임은 이명박 정부와의 교감 아래 이뤄졌을 것이란 추측도 흘러나왔다. 김 전 회장과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이 전 대통령이 그의 세계경영 노하우나 해외 인맥 활용 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지난해 6월 김 전 회장이 청와대에 극비 방문해 이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 측은 “두 분이 만날 이유가 없다”며 부인했었다.
한동안 다시 두문불출하던 김 전 회장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트남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수도인 하노이 인근 근처 골프장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거나 ‘몇몇 국내 건설업체의 베트남 진출과 사업 수주에 도움을 줬다’는 말이 나왔지만 그 때마다 김 전 회장 측근들은 “사실과 다르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었다.
그러나 연구회 측의 한 관계자는 “소문 중 상당 부분은 근거가 있다. 다만 그것을 재기와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베트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국내의 몇몇 기업들이 협조를 요청해 관여한 것으로 안다. 또한 예전부터 베트남의 몇몇 사업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골프장 건도 그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김우중 전 회장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위). 아래 사진은 2005년 김 전 회장 귀국 당시 그의 처벌을 주장하는 사회단체와 전 대우그룹 노동자들의 시위 모습. | ||
많은 재계 관계자들 역시 자사의 베트남 사업체 등을 통해 전달되는 보고서 등을 통해 김 전 회장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베트남 고위 관료들과 자주 만날 뿐 아니라 외국 기업들과 연결해주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에 들어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이 최근 몇몇 지인 및 측근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올해 6월 전 국내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지난 1월 28일 기자와 만난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직접 듣진 않았지만 김 전 회장이 늦어도 상반기에 귀국할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건강도 상당히 좋아진 상태”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연구회의 한 관계자 역시 “평소 김 전 회장은 ‘대우’라는 브랜드가 사라지고 세계 경영 이념이 퇴색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연구회 설립을 반색하신 것도 이 때문”이라면서 “연구회 활동이 본격화될 올해 봄 이후 귀국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현재 김 전 회장은 국내에서의 활동 방안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이 옛 대우 계열사 경영에 자문 형식으로 참여하는 방법이다.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대우인터내셔널 대우조선해양 등이 새로운 주인을 만날 경우 김 전 회장이 고문으로 참여하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포스코의 경우 ‘대우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옛 대우 계열사에 애착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박태준 명예회장과 김 전 회장의 친분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게 재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포스코는 대우엔지어니링을 인수했고 대우조선해양 대우로지스틱스 등의 M&A에 잇달아 뛰어든 바 있다. 따라서 포스코가 매물로 나온 대우 계열사 중 한 곳을 인수할 경우 김 전 회장 머릿속에 있는 국내 복귀 청사진은 실현될 여지가 더욱 클 것이란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연구회가 추진 중인 ‘대우 브랜드화’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그러나 김 전 회장 복귀 전망을 어둡게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거액의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는 한 국민 정서가 그의 국내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김 전 회장 측 역시 이를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연말 경제 5단체가 청원한 사면·복권 기업인 명단에 김 전 회장도 포함돼 있었다. 김 전 회장은 지인 등을 통해 그 결과를 주시했는데 사면이 되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는 그만큼 김 전 회장이 여론의 추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어찌 됐건 조만간 국내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김 전 회장이 과연 향후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절친' 창업 1세대 김우중와 신격호
사석에선 '형님·아우' 사이
특히 일본에서 회사를 설립한 신 회장에게 김 전 회장이 많은 도움을 줬다는 후문이다. 신 회장에게 재계 및 정치권 유력인사와의 ‘다리’를 놔 준 것이 김 회장이라는 소문도 있다. 창업 1세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현직에 남아 있는 신 회장 역시 지난 1999년 대우그룹 몰락 후 오랜 외유를 떠나야 했던 김 전 회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그룹 내부에서 한때 옛 대우계열사 인수를 검토했던 것도 신 회장 지시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는 이러한 둘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직 대우그룹의 한 임원은 기자에게 “신 전 회장이 대우그룹 사태가 나기 전부터 여러 차례 김 전 회장에게 과도한 차입 경영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었던 것으로 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 전 회장과 신 회장 사이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쇼핑이 베트남에 진출하면서부터다. 롯데마트는 2007년 12월 호찌민에 1호점을 열었고 롯데백화점은 2013년 하노이에 개장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양측 관계자들의 공통된 말이다.
롯데그룹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당초 베트남이 우리 사업체의 진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김 전 회장이 협조를 요청한 후 달라졌다. 그쪽에서 먼저 투자를 제안했을 정도였다. 베트남에서 ‘영웅’으로 불린다는 김 전 회장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김 전 회장 측근 역시 “베트남 정부가 부지 확보와 인·허가 등에 있어서 롯데 측의 편의를 많이 봐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 전 회장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가능했겠느냐”라고 말했다. 국내 ‘복귀’를 바라는 김 전 회장에게 신 회장 또한 힘이 돼줄 것이라는 얘기가 재계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이러한 두 사람의 끈끈한 인연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