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다만 눈치 채지 못할 뿐
▲ 지난 5일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전 회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이학수 전 부회장(맨 왼쪽). 사진공동취재단 | ||
이학수 고문은 지난 1월 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 전시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전시장에 이건희 전 회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 회장의 CES 참석은 지난 연말 단독 사면·복권 이후 첫 해외 행보인 동시에 부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리움 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등 자녀들을 대동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이 전 회장 가족 못지않게 눈길을 끈 인물이 바로 이학수 고문이었다. 지난 2008년 4·22 삼성쇄신안 발표를 통해 전략기획실장(부회장)직에서 고문으로 물러난 뒤 여론을 의식한 듯 눈에 띄는 대외 행보를 자제해 온 까닭에서다. 아직 집행유예 상태인 이 고문의 이 전 회장 밀착수행을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은 이건희 회장 시절의 그룹 내 2인자 위상이 그대로 느껴졌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이 고문의 CES 참석이 그간의 물밑 행보에서 벗어나 공식 활동을 재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해석이 들렸고 이후 행사에 이 고문은 늘 이 전 회장과 동행했다.
이 고문은 전략기획실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 줄곧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삼성 측은 “상근 고문이기 때문에 계속 출근했다”고 밝힌다. 그런데 이 고문이 순수하게 ‘고문 역할’만 수행했을 거라 보는 시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삼성쇄신안 발표를 통해 이건희 전 회장이 총수직에서 물러났지만 삼성의 경영은 여전히 이 전 회장의 입김을 통해 굴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재계에선 이 전 회장이 이 고문을 통해 이른바 ‘리모컨 경영’을 한다고 보고 있다.
사실 이 고문이 물밑에서 과거 전략기획실장 시절 수준의 활발한 경영 행보를 펼친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다. 이 고문이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전무의 부사장 승진을 필두로 한 세대교체형 인사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재계 소식통들 사이에 파다했던 것이다.
당시 이 고문 주도하에 신년 초 해왔던 정기인사를 앞당겨 연말에 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됐다. ‘이 전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명분으로 연내 사면·복권된 뒤 밴쿠버올림픽 개막 이전부터 올림픽 유치활동에 전념하려면 인사를 연내 마무리해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국정원 검찰 등 정보·사정기관은 물론 각 대기업 정보팀 담당자들이 ‘이 고문의 인사 개입설’을 앞 다퉈 윗선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 전 회장 사면 협상을 위해 이 고문이 청와대 고위 인사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윽고 지난해 12월 15일 이재용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12월 31일 이 전 회장에 대한 단독 사면·복권이 단행되자 재계의 시선은 이 고문의 경영활동 복귀 가능성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 고문이 이 전 회장의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 적극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 또한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최근엔 이건희-이학수 동반 경영복귀 가능성까지 조심스레 점쳐지기도 한다.
이 전 회장은 지난 5일 ‘고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복귀 시점을 묻는 기자들에게 “회사가 약해지면 해야죠”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경영에) 참여하는 게 아니고 도와줘야죠”라고 덧붙였지만 이는 그동안 재계 인사들 사이에 나돌아왔던 이 전 회장 복귀설과 더불어 ‘2인자’ 이학수 고문의 동반 복귀 가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날도 이 고문은 이 전 회장을 수행했다.
이 고문은 전략기획실장 시절 이 전 회장의 복심으로 통했던 동시에 그룹 내에서 이 전 회장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인사로 통했다. 지난 2007년 10월 삼성그룹 비자금과 이건희 전 회장 차명재산 의혹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는 최근 펴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에서 이 고문을 “이건희 전 회장으로 통하는 언로를 장악하고 있는 실세”라 표현했다. 재계에선 지금도 이 고문이 전략기획실장 재직 시절처럼 이 전 회장 자택을 주기적으로 찾아가 주요 현안을 보고하고 지시사항을 전달받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전략기획실에서 이 고문과 손발을 맞췄던 인사들 중 다수가 그룹 내 주요 보직에 앉아 있다는 점도 이 고문의 막후 영향력을 눈여겨보게끔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한때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통할 정도로 막강했던 이 고문의 존재가 이재용 부사장의 원활한 승계과정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수년 내 이재용 부사장의 총수 등극을 위해서라도 이 고문이 공식 경영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시각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그의 책에서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그룹 수뇌부에서 ‘이학수는 버리고 김인주(전 전략기획실 사장, 현 상담역)는 건진다’는 방침을 세웠다”는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고문보다는 김인주 전 사장이 이재용 부사장 승계과정에서 더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고문이 현 정부와 숙명적 라이벌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라는 점도 변수로 거론된다. 김용철 변호사는 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학수를 ‘학수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며 노무현-이학수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가까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 명분으로 단행된 단독 사면 이후 현 정권과 교감을 넓힌 이 전 회장과 이 고문의 사이가 예전과 같기만 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편 이학수 고문의 역할 논란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전 회장이 편하게 생각해서 비서 역할을 하는 것일 뿐 그룹 내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고 밝힌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들은 “한때 ‘황태자도 넘을 수 없는 2인자’로 통했던 이 고문이 서초동 삼성타운에 꾸준히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삼성이 이미 그의 영향력하에 놓여있는 셈”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