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전·노 사면 합의? YS ‘결자해지’ 의지가 더 컸다
1996년 1월 3일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정부가 추진한 ‘역사바로세우기’ 휘호를 쓰고 있다. 사진출처=<변화와 개혁>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는 과정은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대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인 1994년 10월, 사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2·12 사태 관련자 35명을 기소 유예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지검 공안1부장(현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로 논란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때 YS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바로 직전 대통령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3당합당을 통해 5공 세력까지 모두 끌어안았던 그였기에 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엉뚱한 곳에서 물꼬가 터졌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였다. 정국을 수렁 속으로 몰아넣은 비자금 파문 때 YS는 해외 순방(캐나다에서 열린 UN총회) 중이었다. 전화 통화를 통해 대강의 내막을 전해들은 YS는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지시한 이후 긴 침묵에 잠겼다. 일반 정치자금 문제가 아닌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부정축재사건이기에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던 YS였지만 중차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노태우 비자금 수사와 별도로 5공 군부 세력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나온 것이 5·18 특별법 제정이었다. 귀국 이후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을 청와대로 부른 YS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며 “이 땅에 정의와 법이 살아있음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5·18 특별법 제정 당시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계 일부에서는 공소시효와 소급입법에 관한 위헌 소지를 문제로 삼기도 했지만 사실 별로 문제가 안 됐다. ‘헌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 국민정서법’이라는 말이 있듯이 두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거스를 수 있는 곳은 어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씨는 이미 구속된 상태였지만 전두환 씨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12월 2일 검찰 소환 요구에 그는 “내가 범죄자라면 그런 세력과 야합한 김영삼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내려갈 때 차량 속도가 시속 140㎞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검찰에 전광석화로 체포된 그는 안양구치소에서 기나긴 수감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범털’에 맞서 검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씨는 수감 첫날 단식을 선언하는가 하면 “나는 내가 다이얼을 눌러본 적이 없다”며 전화번호조차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검찰도 만만치 않았다. 공판을 앞두고 검찰은 전 씨에 대한 심문에 대비, 역할극까지 해 보는 등 치밀하게 준비해 5공 세력을 조금씩 무너뜨려 나갔다. 그 주역 가운데 한 명이 지금의 채동욱 검찰총장이다.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이 5·18특별법 제정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아래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 관련 기사들.
결과적으로 5·18 특별법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는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법의 평가는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인 1996년 8월, 전두환 씨는 사형을, 노태우 씨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그 해 12월 항소심에서 전 씨는 무기징역, 노 씨는 17년형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됨).
두 전직 대통령은 문민정부 임기가 끝나기 직전 사면복권 됐다. 많은 이들이 YS와 DJ가 의견을 모아 두 사람을 석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YS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본인이 두 사람을 구속한 만큼 결자해지 측면에서 문민정부 임기 내 사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선자인 DJ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DJ의 가장 큰 약점은 오랫동안 이념 공격을 받으면서 군부세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민정부가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고 DJ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국민의 정부가 이념을 넘어 5공 세력과도 화합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 셈이 됐다. YS보다 먼저 DJ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하나회는 청산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DJ는 끊임없이 군과 갈등을 겪고 타협하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YS는 늘 “죄는 철저히 묻되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나 국민들이나 두 전직 대통령을 똑같은 크기로 용서할 수 있을까. 노태우 씨는 추징금의 90% 이상을 내고 지금도 나머지 추징금 납부를 위해 법에 호소하고 있는 반면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05억 원 가운데 24%(533억 원)만 내고 있다.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 씨가 지금까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에 국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
YS조차 전 씨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꺼린다. 일국의 대통령이지만 어찌 구원이 없을 수 있을까.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금 전두환 씨의 비자금 추징에 나선 것도 개인들의 악연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이후 전두환 정권은 전 정권의 잔재를 악착같이 지우려했다. 워낙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다 보니 박정희 정권을 깎아내리면서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에 대한 추모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오랜 기간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번에 불거진 추징금 환수 문제도 그런 개인적 악연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든, 현 정권의 전두환 추징금 특별수사든 우연한 요소로 인해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있다는 목표만은 동일한 듯하다. 군부 세력만큼은 문민정부를 통해 확실히 청산됐다고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워져도 국민들은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도 이번에 확실하게 추징금을 환수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얻고 이 땅에 더는 대통령 부정축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조선총독부 철거 비화
“한 보수언론사 극렬히 반대”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철거는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시작점이었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는 이벤트로 전국에 생중계되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조선총독부 철거마저도 YS와 청와대는 말 못할 압력과 고충을 겪었다고 한다. 다음은 김현철 교수와 일문일답.
―조선총독부 철거도 중요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었다.
“모든 방송사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컸다. 하지만 이런 명분이 분명한 일에도 극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결정된 일이었지만 그 사이 엄청난 반대가 쏟아졌다.”
―반대한 이들의 근거는 무엇이었나.
“한마디로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초대 정부에서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기도 한 만큼 보존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가 먹히지 않자 수구세력들은 건축학과 교수들과 학생을 동원해 반대를 하고 청와대에 엄청난 투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뛰어난 건축물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린트양식이라나 뭐라나. 건물 잔해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지금처럼 시민단체에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 특히 한 보수 언론사에서 너무 극렬하게 반대를 해 청와대가 직접 경고를 하기도 했다. 철거 직전까지 그야말로 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
―반대에 직면할 당시 YS의 반응은 어땠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철거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관광을 오면 꼭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정이 포함됐다. 사실 문민정부 초반에는 수도권의 모든 일제 상징물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옛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 한국은행 본점(현 화폐박물관), 옛 서울역사(서울역문화관)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반대가 심하니 청와대에서는 조선총독부 철거 이외 다른 건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한 보수언론사 극렬히 반대”
1995년 8월 15일 구 조선총독부의 첨탑이 철거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철거도 중요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었다.
“모든 방송사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컸다. 하지만 이런 명분이 분명한 일에도 극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결정된 일이었지만 그 사이 엄청난 반대가 쏟아졌다.”
―반대한 이들의 근거는 무엇이었나.
“한마디로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초대 정부에서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기도 한 만큼 보존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가 먹히지 않자 수구세력들은 건축학과 교수들과 학생을 동원해 반대를 하고 청와대에 엄청난 투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뛰어난 건축물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린트양식이라나 뭐라나. 건물 잔해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지금처럼 시민단체에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 특히 한 보수 언론사에서 너무 극렬하게 반대를 해 청와대가 직접 경고를 하기도 했다. 철거 직전까지 그야말로 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
―반대에 직면할 당시 YS의 반응은 어땠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철거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관광을 오면 꼭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정이 포함됐다. 사실 문민정부 초반에는 수도권의 모든 일제 상징물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옛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 한국은행 본점(현 화폐박물관), 옛 서울역사(서울역문화관)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반대가 심하니 청와대에서는 조선총독부 철거 이외 다른 건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