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얼굴 인생 ‘신분세탁’
법무부 관계자들이 ‘외국인지문확인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외국인 범죄자·불법체류자 등의 신분세탁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연합뉴스
동사무소 직원은 30여 년이 지나 출생신고를 하는 김 씨가 의심스러웠지만 여러 보증인의 말을 믿고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줬다. 이름까지 ‘이 아무개 씨’로 새로 태어난 김 씨는 1년 반 동안 신분을 세탁하며 살다가 지난달 경찰에 덜미를 붙잡혔다. “얼굴은 똑같은데 이름이 달라 의심스럽다”고 첩보를 받은 경찰이 김 씨의 지문을 조회해 두 개의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어 있는 사실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김 씨가 출생신고를 통해 신분세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인우보증제’ 때문이다. 인우보증제란 보증인 2명만 있으면 출생이나 사망신고가 가능한 제도를 말한다. 애초 병원이 없는 지역의 주민들이 집에서 출산하거나 사망했을 때 신고를 쉽게 하도록 만들어진 이 제도는 신분세탁에 비일비재하게 악용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인우보증인만 있으면 출생, 사망신고가 가능한 주민등록법의 허점 때문에 여러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법 개정이 시급하다”라고 전했다.
인우보증제는 외국인 범죄자나 불법체류자의 신분세탁 용도로 활용되기도 한다. 지난해 검찰은 인우보증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 불법체류자 20명을 입건했다. 이들 중엔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한국으로 도망쳐 온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대적인 적발을 통해 의혹이 잡힌 것은 국내에 전문적으로 인우보증만 서주는 ‘인우보증 브로커’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10명에서 20명으로 구성된 이들 인우보증단은 보통 수백만 원을 받고 암암리에 허위 인우보증을 서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무부 이민특수조사대 관계자는 “신원보증을 할 때 책임을 지도록 출입국 관리법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브로커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외국인 범죄자, 불법체류자 등의 신분세탁의 문제점이 하도 심각해 최근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지문인식확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자진신고 기간을 두고 있다”라고 전했다.
인우보증제가 주로 출생을 세탁하는데 악용된다면, 사망을 세탁하는 경우는 주로 보험업계에서 판을 치고 있다.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시신 없는 살인’을 벌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 2012년 2월 A 보험사 보험사고조사전담팀 관계자는 특이한 사망사고에 주목했다. “친동생이 죽었다”며 보험금 33억 원을 청구한 안 아무개 씨(여·47)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A 사 관계자는 “보험금을 청구할 당시 보험료는 딱 2번밖에 내지 않았고 동생의 사망 후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이틀 만에 화장을 한 점이 의심스러워 조사를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이후 병원과 주변인들에게 탐문한 결과 사망사건에 허점을 발견하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항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속인 노숙자 살인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계기가 됐다.
위조 전문 사이트에 게시된 대학 성적증명서 샘플과 신분증 샘플.
출생, 사망 등 생사와 관련한 신분세탁이 ‘특수한 경우’라면,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진 신분세탁은 ‘증명서 위조’가 대표적이다. 주민등록증은 물론이고 대학졸업장, 호적증명서 등까지 정밀하게 위조가 가능해 ‘인생 세탁’이라고 불릴 정도다.
증명서를 위조하는 업체를 직접 접촉해봤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제시되어 있는 메일주소로 메일을 보내니 4군데 업체에서 답장이 왔다. 3군데의 업체는 ‘전화상의 거래’를, 1군데는 전문 사이트로 접속을 유도하며 자세한 정보를 게시해 놓고 있었다. 한 업체는 “주문이 많이 밀렸다. 다음 날 오전 중으로 전화를 달라”라고 대기 시간을 알려주기도 했다.
업체의 안내를 종합하면 주민등록증의 경우 평균 80만 원선. 하지만 제작 퀄리티에 따라 SA급은 120만 원, A급은 80만 원, B급은 50만 원으로 가격을 나누는 업체도 있었다. 업체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소개를 받았으면 물건을 받은 후 결제를 하면 되고 처음이면 30% 금액을 선입금해야 한다”며 “기본적인 정보를 메일을 통해 보내주면 샘플을 만들어 미리 보여준다. 퀄리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대학 졸업장 같은 경우에는 학교명, 입학년도, 졸업년도를 보내주면 완벽하게 맞춰드린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위조업체는 2006년 검찰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바 있다. 중국, 태국 등에 있는 위조 업체가 적발되면서 국내에서 위조 신분증, 증명서 등을 의뢰한 280여 명이 덜미를 잡혔기 때문이다. 적발된 의뢰인들은 대학생, 회사원, 군인 등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유부남은 애인 앞에서 결혼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가짜 호적등본 제작을 의뢰한 사실이 발각돼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당하기까지 했다.
당시와 현재의 차이점은 중국 등지에 있던 업체들이 국내로 옮겨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위조업체 관계자는 “요즘 중국에서 만드는 업체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며 “세관에서 걸리는 경우가 많아 그렇게 멀리서 거래하지 않는다”라고 전했다. 인천에서 위조 업체를 운영한다는 한 업자는 “인천 고속버스터미널 옆에 S 백화점이 있다. 의뢰가 끝난 후 그곳 정문으로 오면 우리 직원이 직접 물건을 배달해 줄 것이다. 그때 돈을 지불하면 된다”며 구체적인 거래 장소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조를 통한 신분세탁이 만연한 상황에 대해 행정안전부 주민과 관계자는 “홀로그램 등 여러 위조 방지 장치를 걸어놔도 사실상 위조를 막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방지해도 기술은 또다시 계속 뚫리기 때문”이라며 “만약 주민등록증이 위조라고 생각되면 직접 전화로 신고해 위조 여부를 가려내는 식별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