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앉은 위안부 소녀상. 비에 젖은 소녀상이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하다.
고양시에 거주하는 김 아무개 씨(45)는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기다리다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며 “역사적 현장에 늘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항상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평화비가 역사적 현장에 세워지고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기까지는 종로구청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평화비가 세워진 장소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이기 때문에 외교관계를 우려해 드러내놓고 자랑하진 못하지만 당시 종로구가 평화비 건립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종로구가 평화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2011년 3월 25일 건설관리과에 평화비 건립을 위한 도로점용 허가를 요청하면서부터다.
김영종 구청장은 좋은 취지라는 생각에 허가 요청서를 검토한 후 바로 정대협과 평화비 건립에 대한 면담을 나눴다. 김 구청장은 건축사 출신답게 이 자리에서 “소녀의 모습을 담은 ‘소녀상’을 만들면 좋겠다” “소녀상 옆에 예전 초등학교에 놓여 있던 나무의자를 하나 더 놓았으면 좋겠다” “제목을 ‘기다림’으로 하는 게 좋겠다” 등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놨다.
김 구청장의 의지가 반영되면서 평화비 건립과 관련한 행정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평화비가 도로법과 종로구 조례 규정에 따라 도로점용허가 비대상시설물로 구분돼 지원에 어려움이 따르자 건설관리과는 대학로에 설치한 타고르 흉상의 협의 승인을 사례로 들어 대책 방안을 마련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당시 여성가족부로부터 종로구와 협의하거나 승인을 받으면 설치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정대협은 여성가족부에 평화비 건립을 위한 협조 공문을 보냈고 여성가족부→가정복지과→건설관리과→정대협→도시디자인과→가정복지과 순으로 협조 요청 공문이 전달되면서 종로구 주관으로 도로점용 협의가 이뤄졌다.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 수요시위 기념 평화비 소녀상이 설치됐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행정절차는 9월 20일 예상보다 거센 외풍을 만났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기념비 건립허가를 보도하자 교토통신, 마이니치신문, 니시니폰신문 등 일본 유력 언론사들의 문의가 종로구에 빗발쳤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일본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비석의 설치가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줘선 안 된다며 평화비 건립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와중에 내풍도 불었다. 무단설치니, 불법이니, 위반이니, 점용료를 부과해야한다느니 등 평화비 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슬그머니 나왔다.
이에 종로구는 ▲국민감정을 무시해선 안 된다 ▲평화비를 못 세우게 요청하는 사람은 식민잔재의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다 ▲평화비를 노상적치물로 봐선 안 된다 ▲창구를 일원화해 답변한다 등 4대 원칙을 정하고 물밑에서 중단 없이 밀어붙였다.
김 구청장은 ‘건축쟁이 구청장하기’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대통령의 방일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 예민한 문제에 잘못 답변해서 외교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 말을 아껴야 했다”고 회고했다.
마침내 2011년 12월 14일 역사상 유례없는 최장기 1000번째 수요시위가 있던 날 평화비가 설치됐다. 19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첫 수요시위 후 20년 만이다. 종로구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 명소가 탄생한 셈이다.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보이지 않은 손들이 모아져 세워진 평화비에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시민들의 사랑의 손길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송기평 기자 ilyo11@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