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문제 다음 정권에 넘겨야” 건의에 YS는…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고건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엄밀히 말하자면 IMF 사태는 일시적인 외환유동성 위기였다. 금융위기도 경제위기도 아닌 외환보유액이 일시적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당시 아시아권에 도미노처럼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한국도 똑같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전망으로 국내외 채권자들이 단기간에 돈을 빼면서 일시적으로 외화가 부족해진 것이었다.
문민정부 입장에서는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어떤 식으로든 때우고 문제를 다음 정권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실제 일부 관료들은 YS에게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대선과 맞물리면서 국가보다는 집권여당의 미래를 더 신경 쓰는 몇몇 관료들의 요구가 집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업정치인인 YS는 “우리 손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며 고려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초만 해도 재벌기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해 메스를 많이 댔다. YS는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그들이 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지 직접 묻거나 보고서를 작성케 해 받아보기도 했다. 재무제표가 통용되기 시작했고 전문경영인(CEO) 체제가 본격 도입된 것도 문민정부였다. 하지만 관치금융에 젖은 대기업의 습성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IMF 체제를 부른 근본 원인은 지난 30년 군사 정권에서 정경유착과 관치경제가 지속된 탓이 크다. 기업들이 돈이 필요하다면 부실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거액의 대출이 이뤄졌다. 로비하는 것이 연구개발보다 값싸고 손쉬운 방법이었기에 재벌들은 너나 할것없이 정치권에 줄을 댔다.
금융권은 금융권대로 관치금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문민정부가 적극 추진했던 것이 금융개혁법이었다. 금융개혁법은 자본자유화를 통해 국내 증권거래에 숨통을 틔우고 은행을 대형화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발판이었다. 문제는 야당이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1995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동관계법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각에서는 신한국당의 노동관계법 강행 처리를 두고 개악이라 비판하지만 실상 그 내용을 보면 IMF에서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민정부는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고자 했지만 야당은 마치 정부가 노동자를 다 죽이는 것처럼 정략적으로 몰고 갔고 결국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갔다. 그때 야권이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협조했다면 IMF 사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는 청와대에서 주례회동을 갖고 국제통화기금 협약이행을 위한 후속조치와 금융위기 타개방안 등에 관해 협의했다. 일요신문 DB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야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했던 일은 무엇인가. 나는 그가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반대하고 기아부도 처리를 결사반대하고 IMF 협상이 타결되자 재협상론을 제기해 국정운영에 혼선을 초래한 것이 먼저 떠오른다. YS가 책임이 있다면 DJ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그저 IMF 체제에서 빨리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바람에 부작용도 양산했다. 외환은행을 론스타 같은 곳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일은 문민정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놓였을 때 야당은 이를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풀려고 했다. YS는 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부도처리함이 옳다는 생각이었지만 정치권은 수조 원의 세금을 들여가며 기아자동차를 살려 놓았다. 야권에서 ‘국민기업’이라는 이름으로 결사투쟁 했기 때문이다. 아마 해외 투자자의 눈에는 한국이 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물론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문민정부 관료들의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IMF 측과 협상을 주도하던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전격 경질되자마자 집에서 칩거하는 바람에 후임으로 온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전혀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갑작스레 참모진이 바뀌다 보니 함께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대세가 DJ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한 일부 경제 관료들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듯 야권의 눈치를 살폈다. YS 입장에서는 모든 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지막에는 집권여당마저 등을 돌렸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 여권은 YS의 탈당을 요구하며 연일 거리두기에 나섰다. 당시 TK(대구·경북)지역에서는 YS의 인형을 불태우고 몽둥이찜질을 하는 등 의도적인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와 YS를 때릴수록 표가 올라가는 상황이기에 그랬을 테지만 결국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정치권에서는 흔히 YS를 가리켜 “정치는 9단이지만 경제 분야에는 무능력했다”고 말한다. 대통령은 기본 바탕이 경제인이 아닌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꼭 경제의 디테일을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 국가 운영에 있어 방향을 제시하고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지시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경제 역시 통치의 영역이기에 YS는 본인이 직접 경제를 주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경제 관료들이 다음 정권과 그 다음 정권에도 계속 발탁돼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문민정부에서 충분한 역량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요즘 박근혜 정부의 경제 상황을 IMF 당시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전 세계가 불황인 상황에서 수출 주도형인 우리나라는 더욱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이미 가격 경쟁력에서도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역효과라고 본다. 경제민주화는 그저 재벌들 손봐주겠다는 이야기로 비치고 창조경제는 정확한 개념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경제민주화는 규제에 방점을 두고 창조경제는 성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도 모순된다. 대통령이 방향타를 잘못 잡을 경우 경제의 흐름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문민정부에서 IMF 사태가 없었다면 정권재창출은 물론 YS의 인기도 사뭇 달랐을 것이다.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됐다는 평가가 나올 때만 해도 YS의 경제적 능력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과오는 아프게 지적하되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현철 구속에 대한 심경
“나만 계속 희생양 만들어”
“같은 죄로 김한길 대표는 무죄, 나는 유죄”
IMF 사태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당시 김현철 교수는 영어의 몸이었다. 1997년 5월 한보사태에 연루돼 구속된 김 교수는 6개월 뒤인 11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사이 정국은 무척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구속되기 전과 후 세상이 많이 달라보였을 것 같다.
“안에서도 문민정부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바깥에서 보니 더욱 어수선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기였기에 특히나 그랬던 것 같다. 40년간 의회주의자로 살았던 YS가 난생 처음 탈당해 당적이 사라졌고 주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없었다. 나 역시 재판에 시달리느라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었다.”
―한보사태와 IMF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YS는 IMF 사태에 대한 책임을 구태여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내 경우는 다르다. 10여 년간 한보사태에 대한 억울함을 피력해 왔지만 여전히 나는 한보사태로 인해 구속된 김현철이다. 이제는 그냥 대법원 판결문을 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
―김 교수는 2004년 총선 직후에도 구속됐다.
“그때도 97년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당시 대선잔금 일부를 한솔그룹 부회장인 조동만에게 맡겼는데 그동안의 이자소득이라며 나에게 준 돈이 문제가 됐다. 같은 내용을 검찰은 한 번은 조세포탈로, 또 한 번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걸었다.”
―검찰 수사가 김 교수에게 가혹했다는 것인가.
“당시 ‘조동만 리스트’가 나오면서 정치권이 떠들썩했지만 구속된 것은 나와 조동만 둘뿐이었다. 지금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그에게 돈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또 나만 희생양으로 삼고 끝낸 것이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나만 계속 희생양 만들어”
“같은 죄로 김한길 대표는 무죄, 나는 유죄”
IMF 사태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당시 김현철 교수는 영어의 몸이었다. 1997년 5월 한보사태에 연루돼 구속된 김 교수는 6개월 뒤인 11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사이 정국은 무척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구속되기 전과 후 세상이 많이 달라보였을 것 같다.
“안에서도 문민정부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바깥에서 보니 더욱 어수선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기였기에 특히나 그랬던 것 같다. 40년간 의회주의자로 살았던 YS가 난생 처음 탈당해 당적이 사라졌고 주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없었다. 나 역시 재판에 시달리느라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었다.”
―한보사태와 IMF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YS는 IMF 사태에 대한 책임을 구태여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내 경우는 다르다. 10여 년간 한보사태에 대한 억울함을 피력해 왔지만 여전히 나는 한보사태로 인해 구속된 김현철이다. 이제는 그냥 대법원 판결문을 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
―김 교수는 2004년 총선 직후에도 구속됐다.
“그때도 97년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당시 대선잔금 일부를 한솔그룹 부회장인 조동만에게 맡겼는데 그동안의 이자소득이라며 나에게 준 돈이 문제가 됐다. 같은 내용을 검찰은 한 번은 조세포탈로, 또 한 번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걸었다.”
―검찰 수사가 김 교수에게 가혹했다는 것인가.
“당시 ‘조동만 리스트’가 나오면서 정치권이 떠들썩했지만 구속된 것은 나와 조동만 둘뿐이었다. 지금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그에게 돈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또 나만 희생양으로 삼고 끝낸 것이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