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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로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 마루타 심득룡씨의 결혼사진 | ||
1943년 중국과 소련 공산당 정보요원 활동을 했던 조선족 심득룡씨가 그 비운의 주인공. 심씨의 존재는 그동안 중국 하얼빈 ‘731부대 기념관’에 전시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심씨의 신원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최근 그의 정보 요원 활약상과 일본 헌병대 체포 과정, 731부대로 끌려가기까지의 정황을 증명하는 관련 문서와 증언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당시 33세의 나이로 ‘항일 투쟁’의 끓는 피가 솟구치던 심씨의 더운 가슴에 일본군 731부대의 콜레라균 주사기가 꽂히기까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이제 60여 년 전 중국 지하공작의 무대가 됐던 대련시로 장소를 옮겨 심씨의 쓸쓸하고 불꽃 같던 삶을 들여다보자.
심득룡씨는 1911년 5월29일 중국 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요하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11년은 일제가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던 해. 하지만 어린 시절 그는 시대의 고통에 앞서 가족사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 심현도씨를, 10세 때는 어머니 염씨를 여의었기 때문.
동생도 일본군에 잃어
어머니 염씨가 사망하던 해에는 동생 심금용씨가 태어났다. 핏덩이를 품에 안고 고아로 소년기를 보낸 그는 18세가 되면서 삼촌 심일성씨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원이 된다. 심씨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1929년.
당시 조선족이 중국에서 항일 투쟁 활동을 하는 경로는 크게 두 줄기였다. 수립된 지 10년째를 맞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거나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래의 공산당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입당한 지 5년째 되는 1934년 그가 동북항일인민군 소대장과, 같은 부대의 청년단장을 함께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해 열다섯 살이 된 그의 동생 금용씨는 일본 관동군 토벌대에 체포돼 살해되고 만다.
동생을 전장에서 잃은 데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에게는 인민군 정치부 이도원이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소련 모스크바 공산주의대학에 입학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공산당원으로서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 대학 4년 공부를 마친 심씨는 졸업생 중 일부를 선발하는 홍군(紅軍) 참모본부 교육생으로 뽑혀 무전(無電)과 정보 교육 훈련을 받게 된다. 주은래, 모택동 등이 이끌던 1930년대 홍군은 장개석의 남군(南軍)과 다른 독자 노선으로 항일 투쟁을 벌여 중국 농민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군대였다.
이곳에서 2년 교육을 마친 심씨는 1940년 3월27일, 모스크바를 떠나 아라본토(지금의 카자흐스탄) 등을 거쳐 현재의 하북성 근처 ‘기중구’라는 곳에 도착한다. 이때 심씨는 6년 간의 정규 교육을 거쳐 이미 엘리트 요원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중구’의 공산당 사회부장을 맡고 있던 장국건은 당시 상황을 훗날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중공 기중구 사회부 사업을 할 때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진원’(심덕룡의 당원명) 동지를 적에게 점령당한 대련에 이동시킬 임무를 맡았다. 당시 우리에게 상급이 지시하기를 ‘진원 동지는 국제형제당원이다. 그는 우리 당 사회부 정보사업의 강한 영도자로서 반드시 안전하게 목적지에 호송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우리는 당 중앙에서 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엘리트 당원으로 성장
장국건은 천진의 한 방직공장에 심씨를 보내 지하 공작 활동을 위한 도움을 받게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심씨는 왕요선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이 만남은 심씨로서는 운명적인 요소가 많이 배어 있다. 이때 만난 왕씨의 열 살짜리 아들 왕이병이 60여 년 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증언하리라는 것을 심씨는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당의 명령을 받은 왕요선씨는 심씨의 공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심씨의 활동 무대인 ‘대련’으로 가는 여권을 만들어 줬으며 이곳의 ‘흑석초’라는 지역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사진관을 만들었다. 일본군 점령 하에 놓여있던 대련에 ‘아시아의 부흥’을 뜻하는 ‘흥아’ 라는 간판을 내건 이 사진관은 심득룡씨가 무전 공작 활동을 하게 될 일종의 아지트였던 셈.
왕요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진기술을 갖고 있는 그의 친척 이진성을 심씨의 조수로 딸려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왕월선과 조카 등 선후배와 친지 20여 명을 심씨에게 소개했다. 심씨는 이 무렵 부인을 만나 결혼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줄곧 외롭게 자라온 심씨에게는 아마도 이 무렵이 ‘인생의 가장 따뜻했던 날들’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심씨와 인사를 나눈 왕요선의 지인들은 심씨의 교육을 받아 공작 활동을 함께 시작했다.
대련에서의 무전 공작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1943년 4월 어느 날. 비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장춘에 위치한 일본 관동군 제86부대 무선반이 이상한 전파를 감지했던 것. 그 전파는 흑석초의 흥아 사진관에서 심득룡씨가 발신하고 있는 무전파였다. 제86부대와 대련 헌병대는 6개월 동안 연합 정찰을 편 끝에 흥아 사진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1943년 10월1일. 운명의 밤이 다가왔다. 대련 헌병대와 제86부대 정찰부대 70여명이 7개 조로 나뉘어 흥아 사진관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심득룡씨가 전보 발신을 마치는 순간을 신호로 사진관을 덮쳤다. 사진관에 있던 심득룡씨와 그의 부인, 이진성씨 내외 그리고 직원 한 명은 일시에 체포됐다.
8명 중 4명이 731부대로
이 날의 검거를 시작으로 당시 심양, 본계, 천진, 북경에 있던 나머지 무전 공작의 위장 점포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날 일본군 대련 헌병대에 체포된 무전 공작원은 모두 8명. 심득룡씨를 비롯해 왕요선과 동생 왕월선, 조카 왕학련, 이진성, 그리고 이충선, 류만회, 양학례 등 중국인이었다.
이 중 심득룡, 왕요선, 왕학련, 이충선 등 4명은 이듬해인 1944년 봄, 대련 헌병대의 압송으로 하얼빈의 731부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심씨의 소식은 ‘영원히’ 끊기고 말았다. 60여년 후 한 중국인이 그의 이름을 다시 세상에 꺼내놓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