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욕 발동 클린턴과 조깅중 전력질주
1993년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과 새 정부 각료들이 청와대에서 칼국수 점심을 함께하는 모습. 사진출처=94보도사진연감
YS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에서 우리 식구들과 주말 예배를 보고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 쪽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 성수대교 참사와 충주 유람선 화재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기독교 신자인 YS가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경내 불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청와대 관저 뒤편 산책로에는 조그만 불당이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 사람들도 그곳에 불상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하지만 소문이 끊이지 않자 YS는 조계종 고승을 초대해 직접 확인까지 시켜줬다. 이들은 “불상이 미남형에 단청도 잘되어 있다”며 흡족해하며 나갔다. 하지만 며칠 뒤 “불상이 너무 새것 같다. 우리가 오기 직전 부랴부랴 만든 것 같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는 임기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YS가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 충현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다. 대통령이 교회에 오니 경호상 문제로 문마다 금속탐지기를 설치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교회에서 검문을 받게 되니 교인들에게 피해가 간 셈이었다.
이후에는 청와대 경내에서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충현교회 신성종 목사가 직접 청와대를 찾아 예배를 봤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기독교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종교는 물론 종파를 초월한 자리인데 왜 자기 교회 목사만 부르냐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청와대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교회까지, 각 종파 교회 목사를 돌아가면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 대형교회 목사만 부르느냐”는 반발이 나왔다. 일요일 조찬예배를 위해 목사를 선정하는 게 일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청와대 참모진들은 교회 크기는 물론 지역 안배에까지 신경 쓰며 목사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영남 지역에서 한번 오면 그다음에는 호남 지역 목사를 부르고 그다음에는 충청 지역 목사를 부르는 식으로 이어졌다. YS로서는 본의 아니게 전국 각지의 유명한 목사들을 한 번씩 다 만나본 셈이 됐다.
YS가 꼭 찾고 싶어 한 목사도 있었다. 바로 결혼식 주례를 봐 주신 목사였다. YS는 1951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문창교회 담임목사가 아닌 진해에 있는 다른 유명한 목사에게 부탁했던 터였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주례를 보기로 한 목사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는 휴대폰은커녕 전화도 별로 없던 전쟁 상황이었기에 무리도 아니었다.
이에 YS는 급한 대로 “혹시 하객 중 목사님 안 계신가요?”라고 물으니 제일 앞줄에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이 “제가 목사입니다”라며 손을 들었다고 한다. 즉석에서 주례를 구한 것이다. 이후 연락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남아 있던 YS는 당선 이후 그를 수소문해 찾았으나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2. 조깅은 YES, 골프는 NO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함께 조깅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사진출처=94보도사진연감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통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YS가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듯 전력 질주해 클린턴 대통령을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 차이를 벌려 앞서 나갔다. 당시 클린턴은 40대, YS는 60대 후반이었는데 아마도 체력을 좀 과시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당시 청와대에는 골프연습장이 있었다. 연습장까지는 아니지만 북악산 산책로 입구에 티박스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골프공을 북악산 쪽으로 냅다 날리며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물론 공을 주워오는 건 경호실 사람들의 임무였다. 이런 사정을 들은 YS는 “군주 시대도 아니고 이기 뭐꼬”라며 경내 연습장을 없애버렸다.
그런 YS도 야당 시절에는 간혹 골프를 즐겼다. 1990년 삼당통합 성사 직후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한 골프 회동은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날 YS는 샷을 날리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는데 평소 연습도 안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승부욕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날 이후 YS가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3. YS와 보신탕
YS 하면 조깅과 함께 흔히 칼국수를 떠올린다. 실제로 YS는 칼국수를 즐겼고 청와대 오찬에서도 칼국수가 나오는 날이 많았다. 이를 대통령 면전에 대고 불만을 토로한 이가 있었는데 마지막 개성상인 한창수 회장이다.
한 회장은 서울 을지로에서 개성상회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정치인들에게 조건 없이 자금을 빌려주며 후원하던 양반이었다. 항상 백구두에 백바지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영락없는 멋쟁이였다. YS가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도 원래 입던 복장 그대로 왔는데 마술하는 사람이냐며 청와대 경호실에서 당황할 정도였다.
청와대에서 왜 칼국수를 내느냐며 역정을 낸 한 회장이 주식처럼 매일 먹던 음식이 보신탕이었다. 나도 이분 덕분에 처음 보신탕을 먹게 됐다. YS가 가택에 연금돼 있을 당시 김덕룡 실장을 통해 항상 의문의 음식이 공수되었는데 한 회장이 보내는 것이었다. 어느 날 YS는 대학생이던 나에게 칠면조로 만든 수육이니 한 번 먹어보라며 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신탕이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주일이 지나자 그 맛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YS 측근들은 보신탕을 칠면조로 부르곤 했다.
마지막으로 YS야말로 진정한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YS는 호적에는 1927년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는 어머니와 같은 1928년생이다. 출생신고는 1929년에 했다. 당시에도 만 24세부터 국회의원 자격이 주어졌는데 YS는 출마를 앞두고 호적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1년 차이는 정정이 힘들다고 해 1927년생이 됐다. 처음 국회의원 출마 때 상대 후보 진영에서 출생신고를 근거로 “YS는 24세”라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YS는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손명순 여사 이야기
“어머니는 진정한 내조의 여왕”
YS 부인 손명순 여사는 정치부 기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영부인이었다. 지금도 그가 끓여 준 ‘상도동 멸치 시래깃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손 여사는 YS 당선 이후 “부인이 자주 나서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며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김현철 교수 인터뷰 중 손 여사 부분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어머니 손명순 여사는 흔히 ‘그림자 내조’ 스타일로 기억된다.
“실제 내성적인 성격이신데 정치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 외로운 청와대 생활에 유일한 낙이 꽃을 가꾸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텃밭을 따로 만들어 배나무 감나무를 심기도 했는데 감 수확 때가 되면 청와대에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
“아버지는 서울대 철학과 4학년, 어머니는 이화여대 법학과 4학년이었다. 당시 장택상 총리 비서로 있던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중매인과 마산까지 갔다. 마산의 가장 유명한 집안 세 여인을 봤다는데 어머니가 맨 마지막이었다. 중매인이 첫 번째 두 번째에서 아버지를 지치게 만든 뒤 가장 괜찮은 어머니를 마지막에 만나도록 나름의 전략을 짠 것이다.”
―집안과 집안의 만남인 듯하다.
“외가가 마산에서 제일 큰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다. 외가에서 첫 선거 때 사위를 도와준답시고 큰 배에 고무신을 가득 싣고 마산에서 거제까지 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선거법에 걸리는 것이었기에 YS가 역정을 내 그대로 돌아갔다더라. 그 일 이후 아버지가 한동안 처가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에게 가족들의 내조가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
“내가 아버지 담당이라면 어머니는 집사람 담당이었다.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일은 집사람이 다 맡았다. 특히 선거 때 절에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전국 각지에 이름난 절은 다 가본 크리스천이 됐다. 생각해보면 야당 대표 시절서부터 뒷바라지를 많이 하셨다. 상도동계 사람들이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면 싫은 기색 없이 밥도 주고 용돈도 쥐어 주고는 했다. 최형우 전 장관은 ‘나는 YS계가 아니라 명순 여사 계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어머니는 진정한 내조의 여왕”
1999년 거제도 선영에 성묘 후 YS 부부가 산을 내려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어머니 손명순 여사는 흔히 ‘그림자 내조’ 스타일로 기억된다.
“실제 내성적인 성격이신데 정치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 외로운 청와대 생활에 유일한 낙이 꽃을 가꾸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텃밭을 따로 만들어 배나무 감나무를 심기도 했는데 감 수확 때가 되면 청와대에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
“아버지는 서울대 철학과 4학년, 어머니는 이화여대 법학과 4학년이었다. 당시 장택상 총리 비서로 있던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중매인과 마산까지 갔다. 마산의 가장 유명한 집안 세 여인을 봤다는데 어머니가 맨 마지막이었다. 중매인이 첫 번째 두 번째에서 아버지를 지치게 만든 뒤 가장 괜찮은 어머니를 마지막에 만나도록 나름의 전략을 짠 것이다.”
―집안과 집안의 만남인 듯하다.
“외가가 마산에서 제일 큰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다. 외가에서 첫 선거 때 사위를 도와준답시고 큰 배에 고무신을 가득 싣고 마산에서 거제까지 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선거법에 걸리는 것이었기에 YS가 역정을 내 그대로 돌아갔다더라. 그 일 이후 아버지가 한동안 처가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에게 가족들의 내조가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
“내가 아버지 담당이라면 어머니는 집사람 담당이었다.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일은 집사람이 다 맡았다. 특히 선거 때 절에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전국 각지에 이름난 절은 다 가본 크리스천이 됐다. 생각해보면 야당 대표 시절서부터 뒷바라지를 많이 하셨다. 상도동계 사람들이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면 싫은 기색 없이 밥도 주고 용돈도 쥐어 주고는 했다. 최형우 전 장관은 ‘나는 YS계가 아니라 명순 여사 계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