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3당 합당 후유증이, 97년 정권 재창출 실패로…
1990년 2월 15일 민자당 현판을 함께 건 박태준, 김종필, 김영삼 최고위원. 3당 합당은 계파 갈등이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사진제공=대한매일
‘김현철’이 이들의 타깃이 된 것은 사실 3당합당 이전부터였다. 내가 처음으로 YS로부터 정치적 동료로 인정을 받았던 것은 ‘황색바람’을 예견했을 때부터였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제1야당인 민주당은 1987년 대선 패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리멸렬했던 반면 평화민주당은 재야인사를 적극 영입하며 쇄신을 꾀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여론의 흐름도 DJ의 평민당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던 나는 누구보다 먼저 “민주당이 평민당에게 제1야당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겠다”는 분석을 내 놨지만 그때마다 당내 시선은 곱지 않았다. 왜 바깥에서 분란을 조장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시선은 3당합당 직후에도 계속됐다. 초창기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계 세력이 가장 컸고 뒤를 이어 민주계와 공화계 순이었다. 하지만 YS를 주축으로 한 민주계가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가며 급격히 세를 불렸고 결국 문민정부 탄생의 주축 세력이 됐다. 이때부터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문민정부 초반 강력한 사정 개혁은 당내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을 샀다. 슬롯머신 비리, 율곡비리 사건, 동화은행장 비리 수사 등으로 여당 내 민정계나 공화계 출신 인사들이 많이 다쳤기 때문이다. 특정인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울분이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YS가 민주계 인사들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시선은 끊이지 않았다. 계파 갈등에 관해 이렇다 할 반성과 자구책 없이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식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눈길이 나에게까지 왔다.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묻을 수는 없으니 가장 가까운 가족인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 손명순 여사, 김현철 씨가 거제도 선영을 찾은 모습(위). 아래는 국민회의-자민련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 서명식.
따지고 보면 내각제 합의가 파기된 것도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세력이 대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바람에 YS로서는 파기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3당합당 조건으로 물밑 합의가 오간 것이 다 알려진 만큼 국민을 설득할 명분도 없었다.
사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둔 JP의 탈당은 울고 싶은데 주위 사람들이 뺨을 때려준 격이 됐다. 자유민주연합과의 분당은 나에게는 기회로 여겨졌다. 민주자유당이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으로 당을 바꾼 것은 선거를 앞두고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화계와 민정계 일부가 사라지면서 당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1년 간격으로 ‘지방선거-총선-대선’이 연달아 있었기에 각 정파 이해관계가 얽힐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총선 때는 공천을 받아야 하니 다 같이 화합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총선이 끝나고 곧바로 대선으로 직행하려는 욕심은 또 다시 당의 균열을 부르고 말았다. 민정계가 민주계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이회창 당 대표와 손을 잡는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 선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안 좋은 조합이 된 셈이었다.
당내 계파 갈등은 정권재창출 실패로 귀결됐다. 여당은 JP의 탈당과 지방선거 참패로 인해 정치권에 완전히 복귀한 DJ에게 내내 주도권을 빼앗겼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물론 DJ 쪽에서는 지방선거 이전서부터 아태재단을 만드는 등 복귀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전면적 복귀를 꿈꿀 수 없는 분위기였다. 새정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야권은 총선 직전 DJ가 복귀하지 않으면 대권에 승산이 없을 것으로 본 것일 뿐이다.
지금 정치권도 여권에서는 개헌을, 야권에서는 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 호시탐탐 의회주의를 망가뜨리고 정치적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되짚어본 ‘YS 공화국’ 비화
민중당 출신 영입 김현철 입김 작용
문민정부는 32년의 군사 정권을 청산시키고 출범한 민주정부였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마무리는 아름답지 못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이끈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보다 낮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의아한 대목이다. YS 차남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와의 인터뷰를 되짚어 봤다.
하나회 숙정을 빼고 문민정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현철 교수는 <일요신문>과 첫 인터뷰에서 “하나회 숙정은 측근 누구도 YS의 정확한 의중을 꿰뚫지 못한 ‘1인 기획·실행 작전’이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YS는 거사 직전 힌트를 줬다. 군 인사 발표가 있기 3일 전인 1993년 3월 5일, YS는 육사 49기 졸업식 축사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당시 축사는 육사 측에서 준비하는 관례를 깨고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앞두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YS가 몸가짐을 당부하며 들려준 일화는 오싹했다.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 척결을 위해 본보기로 삼은 사람이 바로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퍼지자 장개석이 집을 급습해 수색을 해 봤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일 이후 장개석은 며느리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바로 권총이 든 상자였다.”
그런가 하면 김현철 교수는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인선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그간의 소문을 적극 부인하면서도 “1992년 대선 때 동숭동팀을 이끌었던 선거기획자 전병민과 임기 초반 청와대 사정팀을 담당한 이충범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고 털어놨다. 15대 총선에서는 “컨트롤 타워를 자처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회창 전 총리를 당으로 영입해 총선을 맡기자”는 것도 본인 아이디어였음을 고백했다.
지면에 싣지 못했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 정태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 이른바 민중당 출신 인사를 당으로 영입한 과정에서도 김 교수의 입김이 미쳤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민중당 출신의 영입은 당내 반발이 많았다. 좌파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수 집권당에 편입되는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스펙트럼 넓히는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당선 가능성에 주목했다. 개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여당 공천을 받아 수도권에 나오면 당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비슷한 선거 전략이 되풀이되곤 한다.”
이듬해 15대 대선은 “질 수 있는 선거에서 졌다”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에 이회창 후보에게 당 대표를 맡긴 것은 YS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전하며 “사실 YS는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직을 제안하기 전 이한동 전 총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동 전 총리 역시 대권주자였기에 본인의 출마를 위해 YS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한편 1995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남다른 도전정신도 눈에 띈다.
“결국 고배를 마셨지만 나에게 끝까지 후보 경선을 요구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서울시장 경선에서 당내 입지로는 상대 후보인 정원식 전 총리와 싸움이 안 됐다. 그럼에도 YS와 내가 휴가를 보내던 청남대까지 전화해 경선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패기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는데 대통령까지 됐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민중당 출신 영입 김현철 입김 작용
왼쪽부터 김문수 지사, 이재오 의원.
하나회 숙정을 빼고 문민정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현철 교수는 <일요신문>과 첫 인터뷰에서 “하나회 숙정은 측근 누구도 YS의 정확한 의중을 꿰뚫지 못한 ‘1인 기획·실행 작전’이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YS는 거사 직전 힌트를 줬다. 군 인사 발표가 있기 3일 전인 1993년 3월 5일, YS는 육사 49기 졸업식 축사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당시 축사는 육사 측에서 준비하는 관례를 깨고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앞두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YS가 몸가짐을 당부하며 들려준 일화는 오싹했다.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 척결을 위해 본보기로 삼은 사람이 바로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퍼지자 장개석이 집을 급습해 수색을 해 봤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일 이후 장개석은 며느리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바로 권총이 든 상자였다.”
그런가 하면 김현철 교수는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인선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그간의 소문을 적극 부인하면서도 “1992년 대선 때 동숭동팀을 이끌었던 선거기획자 전병민과 임기 초반 청와대 사정팀을 담당한 이충범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고 털어놨다. 15대 총선에서는 “컨트롤 타워를 자처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회창 전 총리를 당으로 영입해 총선을 맡기자”는 것도 본인 아이디어였음을 고백했다.
지면에 싣지 못했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 정태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 이른바 민중당 출신 인사를 당으로 영입한 과정에서도 김 교수의 입김이 미쳤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듬해 15대 대선은 “질 수 있는 선거에서 졌다”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에 이회창 후보에게 당 대표를 맡긴 것은 YS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전하며 “사실 YS는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직을 제안하기 전 이한동 전 총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동 전 총리 역시 대권주자였기에 본인의 출마를 위해 YS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한편 1995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남다른 도전정신도 눈에 띈다.
“결국 고배를 마셨지만 나에게 끝까지 후보 경선을 요구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서울시장 경선에서 당내 입지로는 상대 후보인 정원식 전 총리와 싸움이 안 됐다. 그럼에도 YS와 내가 휴가를 보내던 청남대까지 전화해 경선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패기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는데 대통령까지 됐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