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반핵 만화 일본 ‘맨발의 겐’ 열람제한 소동

진짜 감추려한 건 잔혹한 역사?

[일요신문] 반전·반핵 메시지를 역설한 유명 만화 <맨발의 겐>이 최근 일본에서 뜨거운 논란을 낳고 있다. 일본 시마네(島根)현 마쓰에(松江)시는 지난해 말부터 관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도서관에서 <맨발의 겐>을 열람할 수 없도록 조치를 내렸다. 만화 속의 옛 일본군이 칼로 아시아인의 목을 베는 등 잔혹한 장면이 많아 아이들이 열람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일본 각지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는 “아이들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며 “열람제한 조치를 해제하라”는 서명운동까지 전개됐다. 또 이번 사태를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와 연관 지어 강도 높게 힐난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맨발의 겐> 열람 제한을 둘러싼 일본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본다.

일본군이 재미 삼아 아시아인의 목을 베는 장면이 잔혹성 논란을 불렀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맨발의 겐>.

“원폭의 피해와 전쟁묘사가 너무 적나라해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 있다.”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원폭과 전쟁의 무서움을 가감 없이 알려야 한다.”

최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는 원폭 참상을 그린 만화 <맨발의 겐>을 아이들이 보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맨발의 겐>은 나카자와 게이지(中澤啓治·1939∼2012)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가족을 잃은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그린 만화.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판돼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사건의 발단은 2012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쓰에시 교육위원회에 한 남성이 <맨발의 겐>을 초·중학교 도서관에서 철수하라고 진정을 접수한 것. 그는 “만화에 옛 일본군의 근거 없는 만행이 게재돼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준다”고 주장했다. 실제 만화에는 일본군이 다른 아시아인의 목을 재미삼아 자르거나 여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장면들이 실려 있다. 또 만화 속 주인공 겐은 “천황은 전쟁범죄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학교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기도 한다.

마쓰에시 교육위원회는 당시엔 남성의 진정을 기각하지만, 2012년 12월 교장회의에서 “초·중학생들이 <맨발의 겐>을 자유롭게 열람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 같은 조치가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에서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쓰에시의 열람 제한 조치를 두고 치열한 찬반 논란이 불붙은 것이다.

먼저 열람제한을 찬성하는 입장은 “잔혹한 장면이 있어 어린 학생들이 자유롭게 읽는 것은 부적절하다” “흥미 위주로 폭력적인 장면만 읽는 학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압축된다. 정치학자 이와타 아쓰시(岩田 温) 역시 “난폭하게 참수하는 장면이 일본군 전체의 방침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면서 “반일사상을 심어줄 수 있기에 학교 도서로는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열람제한을 반대하는 쪽은 “아이들이 전쟁의 비참함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주장한다. 작품에서 잔혹한 장면은 일부에 그치며, 전체 내용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의견이다. 또 “일본군의 만행이 보기 불편해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 때문에 열람제한은 있을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완결된 지 30년이나 된 만화를 왜 이제야 열람제한을 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보였다. 그들은 “혹시 최근 확산되고 있는 우익세력들의 움직임과 연관된 것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의 논조도 찬반으로 뚜렷이 갈렸다. 보수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어른은 자유롭게 읽고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은 도서도 있다. 연령에 따른 적절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진보성향의 <마이니치신문>은 “<맨발의 겐>은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교육에서도 전쟁의 무서움과 평화의 고귀함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질타했다.

이처럼 찬반양론은 팽팽했지만 여론은 열람제한을 반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마쓰에시의 어린이들이 <맨발의 겐>을 자유롭게 읽도록 하자’는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닷새 만에 2만여 명의 네티즌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일본만화가협회도 ‘마쓰에시의 조치는 만화가들의 표현 규제로 연결될 수 있어 우려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전국에서 항의와 비난이 쇄도하자 결국 지난 8월 26일 마쓰에시 교육위원회는 <맨발의 겐> 열람 제한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시 교육위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나온 방침이었다”면서 “철회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논란으로 인해 일본인들 사이에서 <맨발의 겐>에 대한 관심이 증가, 서점마다 품절 현상을 빚고 있다. 출판사 측은 “예년 대비 판매량이 크게 늘었고, 주문이 쇄도해 증쇄 작업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e-mail]

<맨발의 겐>은?

원폭 참상 그려

주인공 겐 눈앞에서 아버지, 누나, 동생이 타 죽는다. 동생이 “엄마 뜨거워요”라고 울부짖는 장면.

실제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자인 나카자와 게이지가 1973년부터 <주간소년점프>에 연재해 1985년 완결한 만화다. 원폭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소년 겐이 어려움을 이기고 꿋꿋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렸다. 모두 10권으로 출간된 단행본은 일본에서 1000만 부 이상 팔렸고,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로도 제작돼 호평 받았다.

눈이 뭉개지고, 손과 발이 녹아들어가는 피폭자. 숨만 쉬고 있을 뿐 애벌레나 다름없다. 그의 앞에서도 이웃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다.

지난해 겨울, 작고한 작가는 생전 “깨끗한 전쟁이란 없다. 전쟁의 잔혹한 실태를 알려 다음 세대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e-mail]

.

‘망언 제조기’ 극우 정치인들 반응

아소 다로도 ‘그건 아니지’

위안부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은 이번 <맨발의 겐> 열람 제한 논란에 대해, 사설에서 철회를 요구한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을 지목하며 “언론이 떠들어 대 교육위원회의 결정을 뒤집었다. 교육위원회의 독립성을 완전히 위협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교육위원회 측에 대해서도 “한심하다. 스스로 독립성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망언제조기로 유명한 인물, 아소 다로 부총리는 “주간지에 연재되었을 당시 작품을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맨발의 겐>보다 열람을 금지해야 할 성인만화들이 훨씬 많다. 그쪽이 더 문제 아닌가”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참고로 아소 다로 부총리는 만화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