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대고 ‘눈엣가시’ 빼냈다
새누리당은 혼외자식을 두고 벌어진 <조선일보>와 채 전 총장의 싸움에 철저하게 거리를 뒀다. 사진은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아니 왜 정치권에서 나섭니까? 둘 당사자들 간에 이 부분을 빨리 결론을 내야 하는 것이고요….”(김태흠 원내대변인)
지난 13일까지 새누리당에선 공식적으로 김재원 당 전략기획본부장과 김태흠 원내대변인을 제외하곤 채동욱 전 총장의 ‘채’ 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 둘의 발언도 ‘우리는 상관없다’로 귀결된다. 왜 그랬을까. 한 여권 관계자의 분석은 이렇다.
“실제로 사의를 표명했지만, 도덕성 문제로 채 총장이 물러난다면 새누리당으로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맡은 검찰이 당장 수장 공백 사태를 맞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왕좌왕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일시 멈춤 상태에서 새누리당은 민생 정국에 고삐를 쥐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진실공방에 관한 수사에도 노란불이 켜져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게 됐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 지지율이 높게 나오면 그냥 올라타면 된다. 또 채동욱 혼외자 정보의 출처로 지목된 국정원도 채 총장의 사퇴로 한숨 돌리게 됐다. 이리저리 잘 피해 다니면서 현 정부에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여권은 정보력 싸움에서 백전백승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지난 4월 검찰총장에 취임한 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을 적용해 재판에 회부한 시점부터 채 전 총장을 미운 오리새끼로 분류했다. 급기야 검찰이 “국가정보원이 대선 여론조작에 조직적으로 개입했고, 경찰은 관련 수사 내용을 은폐, 조작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자 새누리당은 “선거법 적용 재검토”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여의도 정치권과 증권가 정보지 등에서 채 총장 경질설이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근거 없이 그냥 설로만 떠돌았다. 그러다 <조선일보>를 통해 이번 혼외자 논란이 터진 것이다. 새누리당 원내전략 쪽의 한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검찰이 법리적 판단만으로 교과서적으로 움직일 때가 가장 무섭다며 한 이야기다.
김무성(맨 앞줄) 등 새누리당 의원들이 ‘근현대 역사교실’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새누리당의 거리두기는 채 총장이 건재하더라도 나쁠 것이 없었다. 일단 검찰 흔들기 논란에서 구경꾼 노릇만 한 새누리당을 검찰이 직접적으로 돌릴 리는 없다. 검찰의 첫 표적은 <조선일보>가 될 것이고, 2차 타깃은 현 정부 인사들이 될 것이란 분석이 대체적이었다. 그래서 반사이익을 얻는 것은 큰 자리를 노리는 친박계 인사들과 차기 당권이나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이 된다. 하지만 채 총장 사퇴로 군침을 흘렸던 이들 사이에서 한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채 총장이 사의를 표하기 전 한 정치권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청와대 파출소 수준이라는 소릴 듣는 마당이어서 당내 불만 세력이 많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팽’당했다고 여기는 여권 인사도 입을 삐죽 내밀고 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세력이 엄청 많다. 당장 김무성 의원의 역사공부 모임에 그 많은 의원이 등록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박 대통령은 힘이 빠질 일만 남았고, 뜨는 해(김무성)는 힘을 가질 일만 남은 것이다. 당이 살려면 건전한 목소리를 내야 하고, 당이 체급을 올리려면 권력의 정점을 겨눠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 채 총장이 승기를 잡는다면 박근혜 색깔 빼기에 나설 수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자리를 탐하던 이들 세력은 채 총장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변곡점을 다시 찍어야 할 처지가 됐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아예 시선을 인사청문회 쪽으로 돌리는 모습이다. 채 총장이 물러나면서 공인으로서가 아닌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여부는 관전평조차 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공석인 감사원장과 검찰총장 ‘빅2’ 청문회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정권 초반 청문회 파동으로 큰 상처를 입은 이번 정부가 하반기에서마저 ‘청문회 트라우마’를 이어가게 되면 자격 미달 후보를 낸 청와대와 함께 제대로 건의하지 못했다는 공동책임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역대 어느 정부의 검찰에서도 못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수사를 성공적으로 끌어온 채 총장이 물러나면서 여권 내부에서도 “썩 개운치만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검찰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상당히 객관·독립적으로 평가받았던 채 총장 사퇴를 사생활 들쑤시기로 이끌어낸 데 대해 “좀 치사했다. 고수가 아닌 하수의 한 수”라고 혹평한 이도 새누리당 중진 의원이었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