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오너 최태원을 탈탈 털어먹은 사나이
최태원 SK 회장 재판의 주요 당사자이자 핵심 증인으로 지목된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26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취재진의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연합뉴스
제 입으로 재계서열 3위의 대기업을 좌지우지한다는 사람.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52)이었다. 황당무계한 말로 들릴 수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김 전 고문에 대한 최태원 SK그룹 회장(53)의 신뢰가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IMF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은 김 전 고문에게 투자자문을 받으며 최 회장에게도 그를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도 김 전 고문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다만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투자자와 자문전문가로 인연을 맺었으나 김 전 고문의 직업은 ‘역술가’였다.
김 전 고문은 여의도에서 ‘부채도사’ ‘도사님’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었는데 특정 날짜의 주가를 소수점까지 예측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를 이용해 자산가들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술가가 되기 전 김 전 고문은 증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살려 선물투자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역술가로 활동했다.
비록 김 전 고문은 역술인 신분이었으나 최 회장의 신임은 대단했다. 1998년 선친이 별세하자 최 회장은 회사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김 전 고문에게 100억 원을 맡겼는데 이를 3~4배로 불려준 것이 계기가 됐다. 재판과정에서 김 전 고문에 대한 최 회장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곳곳에서 드러났다. 최 회장은 “김 씨가 주가와 환율, 미 연준 이자율에 정통했고 덕분에 나도 열린 시야로 경영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최 회장은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린 김 전 고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며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주변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그를 윗사람으로 대했으며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도 마치 스승과 제자와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처럼 최 회장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김 전 고문은 SK그룹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키워갔다. 최 회장뿐만 아니라 고위간부들도 김 전 고문의 말에 쩔쩔 맸다는 말이 나올 정도. 그가 지시하는 게 있으면 이유 불문 행동으로 옮겨야 했던 탓에 ‘묻지마 회장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김 전 고문의 행동에서 수상한 점들이 나타났다. 200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SK그룹 분식회계 사건에 김 전 고문이 연루되면서 그동안 ‘알 만한 사람’만 알던 그의 정체가 세간에 들통 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손길승 전 회장은 SK해운 자금 7800억 원을 횡령해 해외 선물투자를 하다 검찰에 적발됐는데 투자금의 대부분을 잃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손 전 회장에게 투자자문을 했던 사람이 김 전 고문임이 밝혀졌고 결국 손 전 회장은 횡령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 같은 소동을 겪고도 김 전 고문을 SK해운 고문 자리에 앉히는 등 꾸준한 믿음을 보여줬다.
그러다 신들린 투자실력이 빛을 바래가면서 최 회장이 손실을 입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 2005년 최 회장은 선물·옵션 투자금 명목으로 김 전 고문에게 6000억 원이라는 거액을 건네는 지경에 이른다. 이후 김 전 고문은 최 회장에게 아무런 투자이익금을 전달하지 않았으나 최 회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8년엔 추가로 1000억 원을 건네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최 회장은 어떤 돈도 받지 못했으며 이 모든 돈의 행방은 김 전 고문만이 알고 있는 상태다.
이처럼 금전적인 손해까지 보면서도 최 회장은 2010년 김 전 고문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몸소 경북 경주에 내려가 빈소를 찾는 정성도 보였다. 상주노릇까지 자처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최 회장은 49재에도 모습을 드러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김 전 고문은 최 회장의 ‘충성’을 악용하고 있었다. 2007년 금융상품 판매사인 ‘에이플러스에셋’을 세운 김 전 고문은 최 회장이 건넨 거액을 보험료로 납부하고 거액의 수당을 챙기는 속칭 ‘보험깡’을 하고 있었던 것. 직접 보험설계사 자격을 취득한 덕분에 엄청난 보험 판매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매달 억대의 보험료를 낼 정도였으니 보험업계에서도 김 전 고문은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진짜 실체는 알려지지 않은 채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큰손’ 사업가로 불렸다. 한창 최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을 때는 한 달에 수백억 원씩 보험료를 납부했다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총 환산하면 20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김 전 고문이 자신의 배를 불려간 것과 달리 최 회장은 SK그룹 지주회사나 다름없는 SK C&C 지분만 가지고 있을 뿐 사실상 전 재산을 날려버렸다. 이 때문일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최 회장은 재판이 시작된 후에도 김 전 고문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다 항소심에 이르러서야 태도를 바꿨다.
최 회장은 법정에서 “스스로도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제가 뭐에 홀렸던 것 같다”며 김 전 고문을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 확실히 관계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 회장은 “김 전 고문이 작년 6월까지만 기다리면 귀국해 이번 재판에 대해 직접 해명하고 투자금도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이때부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는 수천억 원을 주무르며 최 회장까지 조정했던 김 전 고문. 그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만큼 ‘김원홍의 실체’가 밝혀질지 주목되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