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죽인 건… 담배가 아닌 미국?
존 웨인
주로 기병대나 카우보이 혹은 군인 같은 캐릭터를 맡았던 존 웨인에게 매우 이례적인 영화가 있다면 바로 <징기스칸>(1956)이다.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백인 남성 스타인 그는 몽골의 전설적 영웅인 징기스칸으로 어색한 분장을 하고 등장한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그저 그런 역사극이었던 <징기스칸>.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위력(?)은 촬영이 끝나고 몇 년 뒤 찾아온다. 몽골 대륙을 배경으로 한 만큼 이 영화에서 로케이션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당시 <징기스칸>은 유타에 있는 ‘세인트 조지’라는 인적 드문 시골 지역에서 촬영되었다. 사막과 평지가 이어진 그곳은 최적의 장소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지역엔 네바다의 사막 지역에서 시작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네바다에선 1953년부터 여러 차례 핵 실험이 이뤄졌다.
사실 딕 파웰 감독과 RKO 스튜디오 쪽에선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국에 위험성에 대한 문의를 했다. 물론(!) 당국에선 아무 문제없다고 답했고, 그렇게 촬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10년 뒤인 1964년 존 웨인은 폐암에 걸렸다. 헤비 스모커인 그에겐 어쩌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우연치곤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배우와 스태프 220명 중 91명, 즉 41%가 그 시기 암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연출을 했던 딕 파웰 감독은 1963년에 이미 임파선암으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한 상태였다. 1960년엔 배우 중 한 명인 페드로 아르멘다리즈가 신장암에 걸렸는데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1963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웨인의 파트너로 등장한 수전 헤이워드는 뇌종양으로 고통받다가 1975년에 57세로 사망했다. 아그네스 무어헤드는 자궁암, 존 호이트는 폐암이었다. 이러한 배우들 외에도 수많은 스태프들이 암에 걸려 있었다. 현장에 놀러왔던 존 웨인의 아들 마이클은 피부암으로 고통받았고, 패트릭은 가슴 부분에서 작은 종양을 제거했다. 헤이워드의 아들도 입 주변의 종양을 제거해야 했다.
<징기스칸> 촬영 현장과 영화속 장면.
“일이 발각되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낯선 사람의 말에 매니저는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며 울먹이자, 그 사람은 권총으로 위협했다고. 웨인은 그 사람이 정부에서 파견된 요원이며 사실 <징기스칸> 촬영 전 미 육군에선 엑스트라들을 모아 몸 상태를 체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방사능 위험 지역의 촬영 허가를 내준 대신 은밀하게 인체 실험을 한 것. 이에 존 웨인이 정식으로 정부에 항의하려 하자 백악관은 발칵 뒤집혔다. 보수의 상징인 존 웨인이 반정부적 인사로 돌변하는 건, 베트남 전쟁 패배로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정부에겐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때 존 웨인은 정부와 비밀 협정을 맺었는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몸을 냉동 보관해 향후 치료 기술이 개발되었을 때 되살린다는 것이 그 내용. 지금도 존 웨인의 시신이 워싱턴D.C. 지하 벙커에 고이 잠들어 있다는 게 음모이론가들의 주장이다.
진실이 어떻든 존 웨인은 1979년 6월 11일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의 장례 미사엔 가족과 절친들만이 참석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코로나 델 마’에 있는 퍼시픽 뷰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명에 “못 생기고, 강인하고, 위엄 있는”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인 “Feo, Fuerte y Formal”라고 새겨달라는 유언은 웬일인지 20년 동안 지켜지지 않다가 뒤늦게 그가 남긴 어록 가운데 한 구절이 새겨졌다.
“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를 배웠기를 희망한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