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범 조아무개씨(36·무직)의 구속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협박편지의 ‘수취인’이 되어야 했던 상당수 대기업 임원들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이들 대기업 임원들의 이름이 담겼다는 이른바 ‘불륜리스트’가 시중에 나돌고 있어 제 2의 협박사건까지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불륜 협박편지 사건은 ‘불륜 증거’를 운운하는 단순 공갈편지에 넘어간 대기업 임원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상류층 인사들의 ‘성 도덕률’에 대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협박범의 불륜편지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당사자들은 저마다 항변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협박범에게 돈을 보내거나 공갈편지에 흔들렸던 까닭은 무엇일까. 불륜 협박편지 사건의 피해자인 대기업 임원들을 연쇄 인터뷰해 사연을 들어봤다.
상장기업인 B사의 임원 A씨. 그도 협박범 조씨가 지니고 있던 상장기업 임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씨로부터 협박편지를 받았던 장본인이다. 또한 뜻밖의 편지를 받고 1백만원을 송금한 8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B씨는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기자와의 통화내용을) 녹음해도 되느냐”며 신중한 태도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편지를 받았을 때 무척이나 당황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편지를) 다 보여줬다. 심지어 집에 가져가 아내한테도 보여줬다”고 말했다. 돈을 송금한 이유에 대해선 “내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일로 결혼을 망치면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한 아내가 혼자 결정해서 돈을 보낸 것이다. 그 일(송금한 것)로 우리 부부는 이혼할 뻔했다”고 털어놨다.
A씨의 주장에 따르면 불륜사실이 있어서 송금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편지를 봤던 아내가 유사시 혼사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혼자서 돈을 보냈다는 얘기다. B씨는 “만약 내가 엉뚱한 짓(불륜)을 했다면 손가락질을 기꺼이 받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거듭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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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엔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합성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망신을 줄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송금을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협박범 조씨에게 1백만원을 송금했던 S기업의 B씨가 그런 경우다.
B씨는 “뒷일이 귀찮아서 송금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인터넷 합성기술이 얼마나 발달해 있나. 혹시라도 내 얼굴을 찍은 사진을 갖고 컴퓨터로 합성한 다음 인터넷에 뿌리면 어떻게 하나 싶어 돈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내가) 업무로 바쁘고, 지방에 있고 해서 다른 조치를 못하고 돈을 보냈다”고 해명했다.
B씨의 주장대로라면 파급력이 큰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조작한 합성사진이 살포될까봐 두려웠다는 얘기다. 그는 협박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대기업 J사의 임원 C씨도 B씨와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C씨는 “인터넷의 파괴력이 무서웠다”고 송금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했다. ‘일 때문에 다방에서 여자와 차 한잔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 장면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는 게 그의 해명이다.
자신을 공인(公人)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C씨는 “당시엔 빨리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C씨는 “창피한 말이지만 (내가) 멍청해서 당한 거다”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 가운데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피해자인 D사 임원 D씨는 비서를 통해 ‘회의중’ ‘중국 출장중’ 등의 이유로 인터뷰를 피했다. D씨의 경우처럼 조씨에게 송금한 사람 가운데 몇몇은 편지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협박편지를 받은 대기업 임원들 중 돈을 송금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협박범 조씨와의 접촉을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 역시 편지사건에 대해선 입이 무거웠다. 편지의 수취인이었던 한 대기업 사장은 비서를 통해 “황당한 얘기라서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편지를 받았던 대기업 임원들이 ‘협박범’ 조씨에게 접근하려 했던 이유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불륜에 대한 입막음이나 경찰 신고 후 유인책으로 조씨에게 ‘만나자’는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협박범의 ‘배후’를 캐기 위해 조씨에게 연락을 했다는 임원도 있었다.
협박편지를 받았던 한 대기업 임원은 실제로 “처음에 회사 내에서 나를 모함하는 사람이 편지를 보낸 것으로 여겨 분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즉, 조씨의 편지를 경쟁자측의 음해성 편지로 생각해 실체를 캐기 위해 만나보려 했다는 것. 이 임원의 얘기에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치열한 생존게임을 벌여야 하는 거대조직의 생리가 묻어 있는 듯해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