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귀머거리로 살았던 운보 김기창 선생(1913~2001) 탄생 100주년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외할머니가 달여 준 산삼을 먹고 열에 끓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살아났다고 한다.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고 살아났으나 그 기쁨도 잠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청력을 희생하고 살아난 그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의 내면이 얼마나 화사하고 힘이 있는가를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 바로 자화상 격인 ‘태양을 먹은 새’다. 화선지를 가득 채우고 깃털이 까만 붉은 새가 당당하게 춤을 추고 있다. 수렴하는 듯, 분출하는 듯 내면의 누런 태양이 자연스럽게 이글거린다. 그 새는 마치 자유의 춤을 추는 것 같다. 난 태양의 아들이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이 그림 앞에 서면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힘을 인지하고 살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소리가 지워졌기 때문에 오히려 신비하고 화려한 세계를 얻을 수 있었던 자의 행운이 보인다.
운보 김기창 탄생 100주년 전이 서울 부암동 서울 미술관에서 10월 17일 개막했는데, 탄생 100주년 기념전의 주제가 ‘예수와 귀먹은 양’이었다.
예수가 누구인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세계를 구한 존재 아닌가. 소리를 희생 제물로 내어준 사람, 그가 바친 제물이 화두가 된 사람이 어찌 ‘희생양’이란 개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예수가 그려진 카드를 받고 막연히 예수를 그려보고 싶었다던 그는 한국전쟁 중에 죽은 예수를 안고 통곡하는 꿈을 꾸고 본격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시작했단다. 그의 예수는 서양의 마구간이 아니라 우리 외양간에서 태어난 이 땅의 예수다. 서양인의 얼굴을 한 금발의 예수가 아니라 머리에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선비 예수다.
외양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서양인의 옷을 입은 서양 처녀가 아니라 물레로 실을 잣는 양갓집 규수다. 그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리는 영적 존재는 천사가 아니라 선녀다. 그는 철저하게 우리 속의 마리아, 자기 속의 예수를 그린 것이다.
그의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죽은 예수를 안고 통곡했다던 그의 피에타 꿈이 그의 생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으려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는 없다. 상처를 두려워하면서 내면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없다. 불행의 심연을 통과해보지 않은 자의 행복은 불안한 행운일 뿐이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