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돌린 당심 돌아온 민심 ‘절반의 성공’
문재인 민주당 의원의 ‘대선 불공정’ 성명을 둘러싼 후폭풍이 적지 않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10월 23일 오후 문재인 의원의 ‘박 대통령의 결단을 엄중히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 발표 이후 여권 반응은 즉각적이고 강도 높았다. 새누리당 원내대변인 김태흠 의원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드디어 민주당이 대선불복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맞받았다.
다음인 24일 오전 최경환 원내대표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무엇을 책임지라는 것이냐. 이런 무책임한 모습이 사초 실종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이런 분(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지 않은 우리 국민이 참으로 현명했다”고 비난했다.
정작 여론은 문재인 의원 쪽에 힘을 실었다. 24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JTBC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정원·군 정치개입 의혹에 관해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56.5%로 나타났고 ‘대통령이 굳이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의견은 34.2%에 그쳤다. ‘잘 모르겠다’는 의견은 9.3%였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문재인 의원이 여야 대결 국면에 직접 나서자 야권 성향 지지층의 관심과 집중도가 높아졌고 결집하는 효과를 냈다. 당 안팎으로 즉각적인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어 여권 압박 작용도 일어났다”면서 “다만 지난 대선의 직접 당사자가 등장하면서 대선불복 프레임도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보수 성향의 박근혜 대통령 지지층도 빠르게 반응하면서 보수 진영에 대한 여론 확장성에 한계를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문 의원의 성명 발표 이후 보수 진영에서는 “지난해 총선과 대선 당시 공무원들의 온라인 활동을 전수조사하자”는 격한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지난 대선 때 공직선거법 위반행위로 선관위에서 적발한 온라인 게시물 가운데 박근혜 후보를 비방하는 게시물 건수가 안철수와 문재인 두 후보를 비방하는 건수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며 “설훈 의원이나 정세균 의원이 말하는 것과 문재인 의원이 나서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의미가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 관해 설훈 의원은 “대선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 보수 진영의 공분을 샀고, 대선 경선에 참여했던 정세균 의원은 “지난 대선은 명백한 부정선거”라고 문 의원에 앞서 밝힌 바 있다.
문 의원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곱지 않다. 문 의원 측이 당 지도부와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독자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성명 발표 이후 문 의원은 “당 지도부와 상의를 거친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일부 친노 인사들의 의견일 뿐, 당 지도부에는 사실상 발표 직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당직자들에게는 “민주당에서 사실상 대선 불복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로 시작하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고 대변인실은 “대선 불복과 연계시킬 사안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기 바빴다. 민주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김한길 대표 등 지도부와는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야권 관계자는 “당 지도부와 상의할 당시 ‘직접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만류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김한길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에서 “대선 다시 하자는 것 아니다”라며 신중론을 펴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 내 친노계와 비노계 간의 해묵은 감정도 엿보인다. 한 비노계 인사는 “속된 말로 황당하다”며 “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 지금은 당 테두리 안에서 일사불란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때이지, 당 지도부와 혼선이 있는 것처럼 비쳐서는 안 된다”라고 전했다.
정치평론가 김대진 조원씨앤아이 대표는 “지난 5월 김한길 대표 취임 이후 문재인 의원의 행보를 보면 트위터를 통해 ‘NLL(서해 북방한계선) 대화록을 공개하라’는 발언 이후 한동안 침묵했고 사초 폐기 의혹 수사로 궁지에 몰리자 ‘나를 소환하라’며 기습 대응했다. 그리고 이번 성명에 이르기까지 당 지도부와 함께한다기보다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번 입장 표명으로 문 의원은 ‘할 말 하는 의리의 정치인’ 이미지를 얻었다는 평가다.
앞서의 윤희웅 실장 역시 “당 지도부와 사전 조율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은 문제”라며 “야권에서도 동일한 기조와 메시지가 나오지 않고 있어 야당의 입장을 대중 호응으로 확산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 의원이 당 지도부와 미묘한 기류를 드러내면서까지 입장을 밝힌 배경은 무엇일까. 여권과 정치평론가들은 “친노 그룹이 NLL 대화록 관련 사초폐기 의혹 수사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복수의 야권 보좌진들의 전언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무수한 요구와 압박이 있었지만 문 의원 측에서 지도부를 배려해 침묵을 지켜왔던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대선 당시 야권 단일화에 앞장섰던 시민사회 원로 인사들과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단체에서 잇따라 문 의원과의 만남을 요구하며 시국선언 등 결단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난 대선 이후 개표 결과를 믿지 못하고 재검표를 요구하는 이들도 포함됐다. 실제 문 의원이 성명서를 발표하기 하루 전날, 한 재검표 청원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문재인 의원실 전화번호를 공개하며 “문재인 의원이 ‘대선무효’ 선언하도록 전화로 촉구해 주십시오”라고 독려키도 했다. 여권으로서는 충분히 대선불복으로 오인할 소지가 있는 대목이다.
지난 6월 문재인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대선이 끝난 이후 문재인 의원에게 수개표와 재선거를 요구하는 데 앞장서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문 의원 측에서 별도 공보라인을 두지 않았던 것도 반복적인 민원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송재준 사회조사분석사는 “문재인 의원이 주요 국면에서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여론의 총량은 급증했지만 정작 당 지지율이 변했다는 유효 데이터는 없는 상황”이라며 “친노라는 이미지에서 ‘친문’이라는 브랜드를 조직화했다는 것은 장점이고, 온라인의 문재인 의원 지지가 오프라인의 야권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단점”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9월 문재인 의원의 한 측근은 사석에서 “당 안에서 문재인 의원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친노 패권을 내려놓으라는 둥, 내년 부산시장에 나가라는 둥, 황당한 요구까지 있다”며 “지도부에서 대선후보였던 사람을 예우해 주지 않고 고립시키는 중이다”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 측근은 최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언론에서 앞 다퉈 보도하고 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문 의원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라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