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이 대선을 3일을 앞두고 국정원 여직원 댓글에 대한 중간 수사를 발표하자 이명박 대통령 측과 박근혜 캠프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진은 국정원의 댓글과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 국정조사청문회. 일요신문 DB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겨뤘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이 공개되자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몇몇 친노 의원과 지지자들이 대선불복 주장을 제기할 때마다 “바람직하지 않다”며 일축했던 문 의원이었기에 그 후폭풍은 더욱 거셌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수세에 몰린 친노의 국면전환 등 여러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선 후보였던 문 의원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면서 “이제는 여든 야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일제히 총공세에 나섰다. 지난 10월 24일 문 의원 발언 직후 나온 당 지도부들의 입장만 살펴봐도 민주당 기류는 쉽게 읽힌다. “댓글과 트위터에 의한 여론조작은 국민이 마시는 우물에 독극물을 풀어 넣는 것(김한길 대표)”, “국정원과 군의 선거 스캔들은 지구촌 뉴스가 됐다. 은폐할수록 현 정권 책임이 될 것(전병헌 원내대표).” 그 중에서도 민병두 전략홍보본부장의 발언이 압권이다. 민 본부장은 “닉슨 전 대통령도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다 국민의 분노를 산 것 아니냐”며 이번 사건을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빗댔다.
이처럼 민주당이 강경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재판 중인 국정원의 정치 댓글 외에도 대선이 부정하게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증들이 잇달아 드러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권과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돼 있다는 얘기다. 최근 국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 소속 요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리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또한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사건을 맡고 있는 검찰 특별수사팀은 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에 올린 5만 5000여 건의 글을 새롭게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 수사팀장(수원지검 여주지청장)과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충돌하며 외압 논란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군과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흔적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헤쳐야 하는데 이를 막으려는 세력들이 있다”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민주당이 가만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민주당의 이러한 공격에 새누리당 역시 전면전을 선포하며 맞불을 놨다. 정권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라는 판단에서다. 그 발언 수위 역시 민주당 지도부 못지않게 높다. “대선불복 사례는 없었다. 민주주의 전통을 흔드는 것(황우여 대표)”, “대선불복의 유혹은 악마가 야당에게 내미는 손길(최경환 원내대표)”, “대한민국 국민이 인터넷 댓글 몇 개만 보고 대통령을 선택하는 고작 그런 수준은 아니다(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당 일각에서는 소수이긴 하지만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몇몇 소장파 의원들은 “박 대통령이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당의 운신 폭이 좁다. 그러다 보니 검찰 수사 등에서도 무리수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정작 박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정원에 빚진 게 없다”, “내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말인가요?” 등의 발언은 박 대통령 상황 인식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박 대통령은 야권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임기 초반 국정 운영이 힘들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어찌됐든 전 정권에서 벌어진 일 아니냐”고 전제하며 “박 대통령이 말을 하면 야당이 펼친 싸움판에 뛰어들게 된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박 대통령의 침묵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발언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정치 전문가들은 “문재인 의원 말처럼 부정선거가 있었다면 그 수혜자는 박 대통령이다. 또 야당은 현 정권의 은폐 의혹도 문제를 삼고 있다. 모른 체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군까지 움직인 박근혜 대통령 측의 ‘보이지 않는 손’을 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민주당의 한 의원은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직원들이 댓글을 달면서 서로 협력을 했다는 주장이 확보된 상태”라며 “박근혜 캠프 누군가가 이들과 핫라인을 개통해 놓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긴 힘들다. 또 그 인물이 배후에서 경찰의 국정원 여직원 사건 수사를 좌지우지했다는 첩보도 있다”고 털어놨다. 민주당은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던 측근 중 서너 명을 그 장본인으로 압축하고 여러 채널을 가동해 확인 중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지난해 대선 때 일부 권력기관 내에서 불법선거가 이뤄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민정팀은 대선 열기가 뜨겁던 지난해 12월 초 ‘권력기관의 몇몇 고위인사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줄을 대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조직을 사적으로 동원해 인터넷 상에서 박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정황이 포착됐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이 대통령에게 올렸다.
이 전 대통령은 즉각 진상 파악을 지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고 한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이 전 대통령은 다른 건 몰라도 대선은 정말 중립적으로 치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알다시피 박근혜 후보와 사이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 누가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며 “공무원들이 특정 캠프를 은밀히 돕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상당히 대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각 기관에 경고도 하고 공직기강을 위한 감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공직사회의 윗선들은 유력 후보였던 박 대통령에게로 기운 상태였다. 레임덕 대통령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이 대선 관련 보고를 받은 지 며칠 후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태(12월 11일)가 터졌다. 그리고 경찰은 12월 16일 이례적으로 밤 11시에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 개입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이 대선을 3일 앞두고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자 정치권에서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청와대 내에서도 경찰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의문부호를 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 측근은 “경찰이 늦은 밤 민감한 사안의 수사결과를 발표한 것을 두고 우리끼리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를 했었다. 경찰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전에 알았다면 재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 국정원 여직원 사건에 대한 청와대 원칙은 엄정한 공정 수사였다. 그것이 지켜졌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없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경찰 중간 수사결과 발표 직후 박근혜 캠프와 이 전 대통령 측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청와대가 수사결과 발표에 의문부호를 달자 박근혜 캠프의 특정 인사들이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다는 얘기다. 당시 박근혜 캠프에선 “선거가 이제 하루 이틀 남았다. 마무리를 해야 할 청와대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라고 경고 메시지까지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청와대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박근혜 캠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캠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던 권력기관의 몇몇 고위 인사들 역시 공공연히 “박 후보가 승리하면 내가 일등공신”이라면서 정권이 바뀌면 특정 보직에 임명될 것이란 말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민주당 의원들은 박근혜 캠프가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어찌됐건 박근혜 캠프는 불법 선거개입을 한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과 라인이 마련돼 있었다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며 “이게 박근혜 캠프가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는 증거가 되진 못하겠지만 사전에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비난을 면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