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NO 아이는 OK! 전통 가족만 가족입니까
미국에서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공동 육아(Co-Parenting)’란 부부가 아닌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서로 합의하에 자녀를 낳고 부모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남녀가 오로지 자녀를 양육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으며, 따라서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 가정을 꾸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와는 다르다. 또한 이들은 연인 간의 애정보다는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아이를 키우며, 때문에 친구와 부부의 중간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생활한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 <포쿠스>는 미국에서 급격하고 증가하고 있는 이런 형태의 가족에 대해 보도하면서 ‘공동 육아’의 장단점에 대해 소개했다.
인디고의 엄마 도운 피케와 아빠 파비앤 블루. 이들은 함께 살며 인디고를 양육하고 있지만 부부는 아니다.
이처럼 피케와 블루는 부모이긴 하지만 부부는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처음 만났던 둘은 먼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친해졌고, 그 후 6개월 동안은 스카이프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은 서로가 원하는 아빠, 그리고 엄마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 삼아 동거를 시작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로 가족이 되기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둘은 인공수정을 통해 몇 개월 후 부모가 됐다.
LA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고 있는 레이첼 호프(42)와 폴 위너(42)는 단 한 번도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다. 둘은 친한 친구 사이일 뿐 연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딸 그레이스가 있다.
처음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앞으로 낳을 자녀의 아빠를 공개 모집했던 호프는 네 명의 후보 가운데 최종적으로 위너를 낙점했다. 위너가 자신이 제시한 아빠로서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세웠던 조건에 대해서 호프는 “자녀 양육을 하는 데 있어서 둘 모두 동일한 가치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미래의 아빠가 될 사람은 운동을 좋아하고 건전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며, 2세를 부양하는 데 있어 50%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못 박았었다.
반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조건은 딱 하나 있었다. 절대 애정을 나누는 연인 사이가 되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저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할 뿐 남편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호프는 4년 전 위너에게서 정자를 기증받아 딸 그레이스를 낳았다.
위의 두 커플은 ‘공동 육아’를 바탕으로 하는 ‘디자인 패밀리’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있는 경우다.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와 구분되는 ‘디자인 패밀리’는 이처럼 남녀가 만나 부모가 될 뿐 부부가 되지는 않는다.
아직은 ‘디자인 패밀리’의 수가 눈에 띄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점차 늘고 있는 추세인 것이 사실. 뉴욕의 가족 연구가이자 공동 양육 포털 사이트인 ‘패밀리바이디자인(FamilybyDesign)’을 개설한 대런 스페데일은 미국에만 벌써 ‘디자인 패밀리’가 수천 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양육 파트너를 찾고 있는 사람만 15만 명에 달하며, 미국을 넘어 영국, 프랑스, 북유럽에서도 점차 공동 육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데일은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자녀 양육과 결혼은 점점 더 서로 다른 삶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면서 “섹스, 배우자,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와 ‘대안 가족’의 트렌드는 함께 한다”고 말했다.
실제 2010년 미국에서 18~29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가 결혼보다는 자녀 양육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52%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응답했던 반면,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30%에 불과했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듯 현재 미국에는 공동 육아 관련 포털 사이트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지난해 개설된 ‘모대밀리(Modamily)’는 이반 파토빅(40)이 개설한 공동 육아 포털 사이트다. 온라인 데이트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지만 배우자감을 찾는 게 아니라 부모감을 찾는다는 데 있어 둘의 목적은 엄연히 다르다.
레이첼 호프(왼쪽)와 폴 위너. 호프는 ‘파트너’ 공개 모집을 통해 선택한 위너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딸 그레이스(가운데)를 낳았다.
때문에 ‘모대밀리’에는 아이를 낳고 싶지만 그렇다고 덜컥 결혼을 하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주로 찾고 있다. 또한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의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30~40대의 여성들만이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 역시 사이트를 찾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들 가운데 3분의 1은 35~50세의 남자들이며, 여자들의 경우에는 남자들보다 나이가 평균적으로 더 어리다. 이 가운데 동성애자들은 여성들의 경우에는 20%, 그리고 남성들의 경우에는 15%다.
이런 만남은 일반적으로 남녀가 소개팅을 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공동 육아 사이트에서 피케를 만났던 블루는 “처음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마치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질문이 오가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가령 “경제적으로 얼마나 안정적인가?” “만일 둘 중 한 명이 좋은 직장으로 옮기게 되어 이사를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파토빅은 사이트에 필히 물어야 할 질문 유형들을 정리해 놓았다. 공동 육아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훗날 발생할지 모르는 갈등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이밖에 전문가들이 ‘디자인 패밀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필수 확인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먼저 심리 상담, 건강 검진을 받아봐야 하며, 그리고 자녀의 양육비는 서로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전에 합의를 봐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둘 중 한 명이 양육비를 댈 수 없는 형편이 될 경우에 대비한 합의도 사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공동 육아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전문의인 크리스티안 슈페만은 “아이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말했다. 이혼과 재혼의 증가로 늘어난 ‘패치워크 가족’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확실한 소속감으로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일 부모가 각각 다른 애인을 두고 있을 경우 디자인 패밀리에서 자란 아이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베를린의 아동 및 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인 지빌리 깁켄스는 “일반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를 설명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는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는 감정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단, 이는 잘 계획된 ‘디자인 패밀리’에서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이에 대해 공동 육아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준비만 잘한다면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고통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토빅은 “공동 육아를 계획하는 사람들은 섣불리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충분히 준비를 마친 후 부모가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율리안 빌리키 정신과 전문의 역시 “디자인 패밀리를 이룬 부모들의 플라토닉 관계는 ‘사랑, 공감, 존중’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의 이런 장점들을 배우면서 자라게 된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