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 제공 ‘5%’ 절대 뺏길 수 없어
현정은 회장은 10월 21일 현대그룹 회장 취임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년을 위한 제2기 신경영을 선언했다. 사진은 10월 24일 현 회장이 블룸비스타 개관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현대그룹
현대그룹의 위기는 현대상선에서 비롯한다. 현대그룹에서 현대상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지난 10월 9일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현대그룹 현황과 주요 모니터링 요소’ 보고서에서 “현대상선이 그룹 내에서 전체 매출액 80%, 자산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신용위험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한기평이 오버한 측면이 있다”며 “그룹 전체 매출에서 현대상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전후”라고 반박했지만 80%나 70%나 비중이 큰 것은 마찬가지다. 즉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지난 6월 말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은 무려 895%. 동양그룹 사태로 부채비율 200%가 넘는 기업들이 집중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은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해운업 특성상 선박·시설 등과 관련된 장기부채 성격이 많이 반영돼 있다 하더라도 895%의 부채비율은 위험한 수준이다. 현대상선이 지난 9월 초 산업은행에 ‘회사채신속인수제(신속인수제)’를 신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신속인수제란 쉽게 말해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차환과 관련, 은행이 지원해주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경우 산업은행이 80%를 지원해주고 현대상선이 20%를 차환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은행이 차환해준 금액을 차근차근 갚아나가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신속인수제 신청은 기업이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대개 신속인수제 신청을 꺼린다”며 “신청하는 순간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시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현대그룹 관계자는 “차환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금 문제는 장기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좋은 제도는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신청한 것”이라고 맞받았다.
그렇다고 은행이 무조건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속인수제를 신청한 기업은 주채권은행과 재무개선 자구계획을 제출하고 여신거래특별약정을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현대상선은 최대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5%를 산업은행에 담보로 제공했다. 만일 현대상선이 회사채 차환을 지원해준 산업은행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산업은행은 이 지분을 매도해 차환 금액을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현정은 회장 경영권 방어에 위기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관측은 여기에 기인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질 필요 없이 현대상선과 현대그룹, 그리고 현정은 회장이 살 길은 하나, 해운업황 개선이다. 지난 몇 년간 조선·해운업계는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현대상선뿐 아니라 한진해운 등이 어려움에 빠져 있다. 대표적인 조선·해운사인 STX조선해양, STX엔진, STX중공업이 채권단 자율협약체제에 들어갔으며 STX팬오션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STX그룹은 와해 일보직전이다. 비록 현대상선이 지난 2분기 317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해 10분기 만에 흑자전환했지만 영업이익은 여전히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부채비율은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져만 가고 있다.
일부 해운업계 관계자 중엔 “규모가 크고 사업구조가 다변화돼 있는 현대상선은 그나마 버틸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업황 개선 없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힘들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당초 예상보다 업황 개선이 더디다”며 “내년부터 좋아질 것으로 봤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마저도 확신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오히려 내년 해운업계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유수의 글로벌 해운사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데다 운임 덤핑도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 해운사간 가격 카르텔(담합) 형성 움직임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해운업은 글로벌 산업이기에 어느 한 기업만 일방적으로 좋아질 수 없는 구조”라며 “비록 글로벌 업황 개선이 더디지만 현대상선은 버틸 힘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0월 21일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10주년이 된 날이다. 현 회장은 남편인 정몽헌 회장 사후 위태롭던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올라 10년을 끌고 왔다. 남북관계 경색에 따른 대북사업 위기 때도,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셨을 때도, 범현대가·쉰들러 등에 줄기차게 경영권을 위협받을 때도 현 회장은 정면돌파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회장 취임 10주년을 맞아 현 회장은 경영권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취임 10주년을 마냥 들뜨게 보낼 수 없는 이유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