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격 당시 ‘영혼과 대화’에 심취… 운명의 전주곡
나는 북한학 전공학자와 국제정치학자들로 좌담회를 열고 남북관계의 추이와 전망, 국제정세 등에 관한 토의 내용을 정리,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글타자로 작성된 A4용지 5매 내외의 이 보고서들을 밑줄을 처가면서 정독하는 한편 건의된 후속조치에 대한 지침까지 달아주셨다. 이어 8월 3일 사채동결조치인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 내려졌다. 사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을 회생시키는 획기적 조치였다. 이것은 김용환 비서실장 보좌관이 극비리에 진행한 것으로 경제수석비서실도 모르게 작업을 완료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이 일어난 현장.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사진제공=<조선일보>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유신은 △남북대화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내부체제 정비와 강력한 대북태세 강구의 필요성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야당과 선거 때마다 수십만의 군중동원에 따른 불의의 사고 위험과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행태 지양 △도약 단계로 접어드는 경제 건설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마무리하려는 강한 집념 △북한의 증강된 전쟁도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주한미군 철군에 대비한 방위산업 육성과 미사일, 핵, 신무기 개발 등 자주국방태세 완비를 위한 사명의식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단된 것이다.
나는 유신선포 이틀 전부터 준비 작업에 투입됐다. 남산 중앙정보부 인쇄공장에 가서 김영광 판기국장의 안내를 받아 인쇄 중인 유신 관계 문건을 점검, 인수해 청와대로 가져왔다. 10월 16일 유신선포를 위한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한편 유신선포문을 기초로 한 유신헌법 초안과 해설서 집필을 위해 헌법학자 한태연, 갈봉근과 함께 반도호텔(롯데호텔의 전신)에 투숙하여 작업을 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프랑스 드골 헌법의 대통령 비상대권과 권력의 인격화 등 이론적 근거를 체계화했다.
나는 이틀 뒤 바깥바람에 목말라하는 이들과 함께 무교동으로 나가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밤공기를 쐬게 했다. 언론계 중견기자 몇 사람에게도 비밀리에 신문·방송용 해설서 집필을 의뢰하고 함께 반도호텔에서 지냈다.
유신 기간 동안 일부 자유의 유보, 반정부 투쟁의 격화, 정치 실종 등 갈등이 극심했으나 경제면에서는 연평균 11.2%의 고성장을 했고 특히 중화학공업은 22%의 유례없는 경이적 성장을 했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 대한민국의 기반을 그때 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72년 11월경부터 스피치라이터실은 ‘중화학공업 건설 선언’을 하는 박 대통령의 1973년 연두 기자회견 준비에 몰두했다. 그때만 해도 중화학공업의 개념이 생소하고 막연했다. 중화학공업 기획단장을 겸한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실로부터 자료와 내용설명 등을 들어가면서 연설문을 작성했다.
제철, 비철금속, 조선, 중기, 석유, 전자, 비료 등 총규모 100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당시 연 수출 20억 달러 미만의 경제 여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출주도형 경제적 자립 외에 무기 국산화와 자주국방 완성이라는 두 가지 국가목표를 지향하는 프로젝트였다.
평시에는 일반 산업체제로 원자재 및 부품생산과 수출에 주력하고 유사시에는 군수산업체제로 전환, 무기 생산으로 대처하는 ‘병진정책’이었다. ‘모든 기계는 부품 생산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무기는 부품 조립으로 완성된다’는 오원철 수석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한 연두기자회견 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파아랗게 펼쳐지는 환상을 보았다.
중화학공업 선언이 있고 난 뒤 3월경 박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을 마치고 일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 <합동통신> 조성천, 동아방송 최종철, <경향신문> 이용승 기자들을 위하여 축하송별 만찬을 베풀었다. 김성진 대변인, 유혁인 정무, 선우연 공보비서관, 필자 등이 배석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저축성과 근면성에 대해 일본 등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을 비교, 설명하면서 환경과 조건의 유·불리보다는 국민의 근면성 도전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풍부한 자원과 유리한 환경임에도 국민의 나태성 때문에 선진국이 못 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자원도 빈약하고 남북대치의 악조건 하에서도 저축을 증대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도 부강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저축 증대를 특별히 강조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각국의 국민 저축률과 국민성을 비교 분석한 책자 한 권씩을 출입기자들에게 선물했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병진정책이 추진되던 1977년, 나는 우리 경제가 20년 내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경제와 새마을운동, 민생문제에 대해 활력과 자신감이 넘쳤다. 핵 개발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파키스탄보다는 앞설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수석비서관들 사이에서 오갔다.
나는 스피치라이터 1년 수개월이 지났을 때 김성진 대변인과 협의하여 박찬세를 스피치라이터로 초빙했다. 그는 나와 대학 동기생으로 <고대신문>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4·19 전야 4·18 고대학생의거 격문을 썼던 뛰어난 문장가였다.
나는 공보비서관 재직 시인 1974년 대통령 가족들의 저도 여름휴가에 수행했다가 육 여사로부터 인간 영혼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다. 영혼과의 대화 등 심령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영혼과 대화를 한다는 안(安) 아무개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육 여사는 서울에 돌아와 8·15 경축식장 참석 중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흉탄에 숨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TV를 통해 이 끔찍하고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왔고 경호관이 박 대통령을 연단 안쪽으로 피신시켰다. 육 여사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정일권 국회의장과 양탁식 서울시장이 그 의자 밑으로 숨었다.
육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박 대통령은 중단했던 경축사를 다시 계속해 끝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리고 연설을 끝낸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육 여사의 고무신을 주어서 들고 퇴장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여준 박 대통령의 담대, 의연한 모습은 초인적이었다. 경악과 존경을 금할 수 없었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되고 내면화된 의지이고 인격이며 투철한 사생관의 발현이었으리라.
나는 사무실에서 육 여사가 가료중인 서울대학병원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원하면서 기다리던 중, 오후 4시경 갑자기 주위가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청와대 본관 지붕 위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있었고 그 위로 붉게 물든 석양노을이 찬란하게 비쳤다. 황홀하고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심령학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닥쳐올 앞일을 예언한 듯, 그때의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육 여사 장례행렬을 따라 국립묘지까지 가면서 연도에 운집한 국민들의 슬픔과 울부짖음,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애도와 추모의 깊은 정을 보았다. 그것은 민심인 동시에 천심이었다.
나는 육 여사 묘비 건립을 하명 받았다. 충청남도지사에게 보령산 최고의 오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문은 <서울신문>에 게재된 모윤숙의 조시가 좋을 것 같아 대통령 재가를 받은 뒤 모(毛) 시인의 승낙을 받았다. 글씨는 육 여사와 두터운 친분을 가졌던 한글 궁체의 대가 이철경 금란여고 교장이 써주었다.
각자(刻字)는 망우리에 있는 묘비 제작의 1인자를 찾아가 부탁했는데 그의 조수가 군복무중이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국방부에 연락하여 그 조수에게 2개월간 특별휴가를 내도록하여 묘비 제작 작업을 완성토록 했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