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70
- 이어령 <우리문화박물지> 중에서
버선은 한국 고유의 ‘발옷’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한민족의 발을 보호하고 맵시를 살려주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한복의 유려한 아름다움이 ‘곡선을 그리며 살짝 올라온’ 버선코로 완성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옷과는 찰떡궁합이다. 치마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새하얀 버선코는 여성의 자태를 한층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타래버선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버선도 전통한복 전문점 등을 통해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나마 아기 돌 때 타래버선을 신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사진제공=한복짓는 복나비
삼국시대에는 귀족 계층이 화려한 비단으로 발을 감싸는 ‘말’을 신었고, 고려시대에는 계층 구분 없이 하얀 베로 만든 ‘족의’를 즐겨 신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최세진이 지은 ‘한자학습서’ <훈몽자회>에는 ‘보션(버선의 옛말) 말’이라는 뜻풀이가 적혀 있다. 당시가 16세기 초였던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훨씬 이전부터 버선이란 이름이 시중에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버선은 재질이나 용도에 따라 솜버선(솜을 넣은 버선), 겹버선(솜 없이 두세 겹으로 만든 버선), 홑버선(한 겹으로 만든 버선), 타래버선(색실로 수놓고 끈을 매단 아이용 버선) 등으로 구분된다. 사람마다 발 크기가 다른 탓에 예전엔 성인이 되면 자신의 버선본을 떠 두었다가 이것으로 각자 버선을 계속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본뜨다’는 우리말도 버선본을 뜨던 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옛 시절 버선은 필수 혼수품이기도 했다. 시집갈 때엔 혼수로 버선을 몇 죽(10켤레)씩 지어 가고, 부유한 집에선 따로 버선장롱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장독에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는 풍습도 있었다. 잡귀를 쫓고 장맛이 변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전염병이 돌 때에 문지방에 버선을 내걸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나중엔 한지를 버섯 모양으로 잘라 만든 부적이 민간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황진이 버선. 사진제공=한복짓는 복나비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버선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의복이었다. 193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만주동포 돕기, 동족애 발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잠시 보자.
“재만동포의 피난 참상이 본보에 소개되자 화산과 같이 폭발되는 동족애는 버선 한 켤레와 옷 한 벌에서부터 발로되어 이곳저곳에서 의복과 금전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입었던 옷과 신었던 버선을 벗어 보내고 자기 자신들은 떨고 있는 갸륵한 생각은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전쟁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너도 나도 성품과 성금을 보냈는데, 온정이 담긴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버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버선의 마지막 전성시대는 그리 길지 못했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 한복이 양복에 밀려나면서 결국 버선도 양말에 ‘국민 발옷’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제는 전통예술을 하는 사람들과 전통한복 전문점 등을 통해서 버선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정도다. 서민의 삶 속에서는 설 명절 때에야 신거나 볼 수 있는 역사의 유물로 변해가고 있다. 그나마 아기 돌 때 타래버선을 신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버선발로 달려 나가다’ ‘말 태우고 버선 깁는다’ ‘남의 밭에 버선 신긴다’…. 버선이 등장하는 적잖은 속담과 관용구는 우리가 버선의 민족임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버선은 살아 있는 의복이 아니다. 고유 버선의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서 되살릴 방법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