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풍족하면 부패” 통치자금 엄격 운용
김정염 비서실장 재임(1969년 10월~1978년 12월)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을 제외하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일요신문 DB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뜻밖에’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경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정치 등 비경제분야를 포함한 국정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국정운영을 보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많아 적격하지 못하다”고 겸양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국가경영의 요체는 안보와 경제다. 국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대본인데 최근 북의 도발이 가중되고 있고 국제정세가 격변하는 등 안보 상황이 위중함으로 나는 국방태세 강화와 안보외교에 전념해야 한다. 나를 대신하여 경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처음부터 경제에 관해 전폭적인 권한위임을 받은 셈이다.
그는 이미 5·16 직후 있었던 화폐개혁의 실무책임과 한일회담 청구권 대표를 맡으면서 박정희 시대의 주요 경제운용에 깊숙이 개입했었다. 이후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을 거쳐 재무장관 상공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수립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는 경제 건설의 기초를 놓았고 1970년대에는 그 발전과 성장을 이끌었다. 1978년 12월 말 퇴임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수출 증진과 중화학공업 건설 등 1970년대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나가는 데 혼신을 다해 헌신했다.
나는 1974년 10월부터 1978년 12월, 그의 퇴임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그의 보좌관으로 봉직한 바 있다. 그의 구체적인 업적은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한국 경제정책 30년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저서는 한국 경제개발사의 1차 사료적 자료로서 경제학도, 지식인, 정치인뿐만 아니라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발전 과정을 알게 하는 국민 필독의 고전이다. 또한 경제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계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정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김정염 비서실장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의 영문판 표지.
그는 비서실장이 되면서 주한 미국대사(포터, 하비브, 슈나이더)들과 회합을 갖고 한미 현안에 대해 차원 높은 협의를 지속했다. 특히 카터 행정부 때에는 슈나이더 대사와 월 1회 단독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 자주국방태세 강화를 위한 신무기체계 개발, 소위 인권 문제를 포함한 긴급조치 등 한미 군사·외교 현안 전반에 걸쳐 긴밀한 협의와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요담을 계속했다.
그는 대통령 통치자금과 관련하여 “대통령께서 돈을 너무 많이 쓰게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께서 풍족한 자금을 쓰게 되면 자칫 부패, 정경유착, 국가부패 풍조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엄격히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절약과 절제를 수범했다. 그는 경제인들의 정치헌금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엄격한 원칙을 세워 운용했다.
①3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이익을 낸 업체로 제한했다.
②비료, 농약, 종자, 사료, 농기구 및 영농 관련 업체와 어구·어선 제조업 등 농·축·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업체는 배제했다. 이들 업체에 대해서는 여유이익분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농·축산 및 어민들에게 되돌려 주라는 의미에서다.
일례로 경기농약회사 소유주 권태흥이 정치헌금 제의를 해왔을 때 김 실장은 농어민 관련 기업 배제 원칙에 따라 성금을 접수하지 않았다. 당시 경기농약은 다른 제조업 못지않게 영업이익을 많이 낸 건실한 기업이었다. 이에 권 사장은 그해 연말 고향을 찾아가는 여공들을 위해 방한복을 대량 기증했다.
③자발적 순수 성금 원칙 아래 이권이나 청탁거래 등과의 연계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의 비서실장 재직기였던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산업기반 조성기를 거쳐 연 12%의 본격적인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발전 지원과 기업육성 및 수출 진흥정책에 힘입어 실적과 이익을 많이 낸 기업들의 자발적인 순수 성금만을 접수했다.
어느 한 기업의 과다한 성금 제의나 이권과 관계된 거래 연계 가능성이 있는 성금 제의는 철저히 배제했다. 30개 대상 기업들이 형편대로 골고루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달된 정치자금은 시중은행에 골고루 예금해 두었다가 쓰곤 했다.
국방헌금과 새마을성금 등도 함께 접수했으나 국방부와 새마을 관계 기관에 이관, 관리했다. 특히 새마을성금에 있어서는 정부의 새마을사업 외에 비예산 필요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④박 대통령에 대한 기업인들의 사적 접근을 봉쇄함으로써 이권청탁의 길을 차단했다.
김 실장 재임 중 경제인의 박 대통령 사적 독대 사례는 박태준 포항제철회장을 제외하고는 1건도 없었다. 김 실장도 9년여 동안 경제인들과의 사적 만남이 1건도 없었다.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맨 아랫줄 왼쪽서 세번째)에게 어떤 외부 간섭이나 청탁이 없도록 ‘종이마패’를 써주었다. 일요신문 DB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현대조선 창설과 관련하여 비교적 박 대통령과 잦은 만남을 가졌으나 독대는 없었고 모두 관계 장관, 김 비서실장 및 관계 비서관 배석 하에 공적업무를 위한 만남이었다.
비서실 운용에 있어서도 절제와 검약 겸손과 협조의 기풍을 진작했다. 그는 보리, 잡곡 권장기에는 보리잡곡밥을, 분식 때에는 국수와 짜장면을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 배달해 주는 대로 9년여 동안 점심으로 먹었다.
그는 공적 업무수행 이외에 사적인 외부접촉은 철저히 차단 자제했다. 주말 운동도 반드시 수석비서관들하고만 했고 외부인사와의 회식은 없었다. 나는 공화당 당직자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제한적인 인사들과의 주말 운동 또는 회식 등을 조심스럽게 건의했으나 김 실장은 한번 길을 트면 겉잡을 수없이 확대되거나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부접촉을 삼가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대통령부(청와대) 자체가 최고의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주어진 권한의 80% 범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장관급이던 수석비서관제를 차관급으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행정부에 대한 대통령비서실의 월권, 간섭, 군림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했다. 행정부처 간의 협력과 조정의 역할을 권장했다.
참모 연구보고와 말씀자료에 대한 대통령의 서명을 근거로 한 지시각서 시달을 폐지시켰다. 이때의 대통령 서명은 읽어보았다는 확인인데 이것이 지시각서로 부풀려 행정부로 하달될 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는 것이다. 이는 상공부, 재무부 장·차관 시절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하여 시정 조치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